北韩的国宝遗迹

[북한의 국보유적100]제1호 평양성

평양성은 427년 장수왕이 집안의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고구려시대의 성곽이다. 평양시 중구역과 평천구역에 걸쳐 위치하고 있는 평양성은 6세기 후반 고구려의 도성으로 건설된 이후 대체로 그 외곽을 원형대로 유지돼 왔다. 평양성은 북쪽으로 금수산이 있고, 보통강을 따라 뻗다가 대동강과 보통강이 해자를 이루는 지대에 자리 잡고 있는데 그 둘레는 약 16km에 이른다. 지세가 낮은 곳으로부터 외성․중성․내성․북성으로 구획되어 있다. 내성은 을밀대에서 남산재에 이르는 지대를, 중성은 내성의 남쪽 안산에서 동쪽으로 대동강까지의 지대를, 외성은 중성의 남쪽 대동강까지의 넓은 지대를, 북성은 내성의 북쪽 모란봉과 전금문 일대를 포괄한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1호 평양성
평양성은 427년 장수왕이 집안의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고구려시대의 성곽이다. 평양시 중구역과 평천구역에 걸쳐 위치하고 있는 평양성은 6세기 후반 고구려의 도성으로 건설된 이후 대체로 그 외곽을 원형대로 유지돼 왔다. 평양성은 북쪽으로 금수산이 있고, 보통강을 따라 뻗다가 대동강과 보통강이 해자를 이루는 지대에 자리 잡고 있는데 그 둘레는 약 16km에 이른다. 지세가 낮은 곳으로부터 외성․중성․내성․북성으로 구획되어 있다. 내성은 을밀대에서 남산재에 이르는 지대를, 중성은 내성의 남쪽 안산에서 동쪽으로 대동강까지의 지대를, 외성은 중성의 남쪽 대동강까지의 넓은 지대를, 북성은 내성의 북쪽 모란봉과 전금문 일대를 포괄한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1호 평양성
평양성은 427년 장수왕이 집안의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고구려시대의 성곽이다. 평양시 중구역과 평천구역에 걸쳐 위치하고 있는 평양성은 6세기 후반 고구려의 도성으로 건설된 이후 대체로 그 외곽을 원형대로 유지돼 왔다. 평양성은 북쪽으로 금수산이 있고, 보통강을 따라 뻗다가 대동강과 보통강이 해자를 이루는 지대에 자리 잡고 있는데 그 둘레는 약 16km에 이른다. 지세가 낮은 곳으로부터 외성․중성․내성․북성으로 구획되어 있다. 내성은 을밀대에서 남산재에 이르는 지대를, 중성은 내성의 남쪽 안산에서 동쪽으로 대동강까지의 지대를, 외성은 중성의 남쪽 대동강까지의 넓은 지대를, 북성은 내성의 북쪽 모란봉과 전금문 일대를 포괄한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1호 평양성
평양성은 427년 장수왕이 집안의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고구려시대의 성곽이다. 평양시 중구역과 평천구역에 걸쳐 위치하고 있는 평양성은 6세기 후반 고구려의 도성으로 건설된 이후 대체로 그 외곽을 원형대로 유지돼 왔다. 평양성은 북쪽으로 금수산이 있고, 보통강을 따라 뻗다가 대동강과 보통강이 해자를 이루는 지대에 자리 잡고 있는데 그 둘레는 약 16km에 이른다. 지세가 낮은 곳으로부터 외성․중성․내성․북성으로 구획되어 있다. 내성은 을밀대에서 남산재에 이르는 지대를, 중성은 내성의 남쪽 안산에서 동쪽으로 대동강까지의 지대를, 외성은 중성의 남쪽 대동강까지의 넓은 지대를, 북성은 내성의 북쪽 모란봉과 전금문 일대를 포괄한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1호 평양성
평양성은 427년 장수왕이 집안의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고구려시대의 성곽이다. 평양시 중구역과 평천구역에 걸쳐 위치하고 있는 평양성은 6세기 후반 고구려의 도성으로 건설된 이후 대체로 그 외곽을 원형대로 유지돼 왔다. 평양성은 북쪽으로 금수산이 있고, 보통강을 따라 뻗다가 대동강과 보통강이 해자를 이루는 지대에 자리 잡고 있는데 그 둘레는 약 16km에 이른다. 지세가 낮은 곳으로부터 외성․중성․내성․북성으로 구획되어 있다. 내성은 을밀대에서 남산재에 이르는 지대를, 중성은 내성의 남쪽 안산에서 동쪽으로 대동강까지의 지대를, 외성은 중성의 남쪽 대동강까지의 넓은 지대를, 북성은 내성의 북쪽 모란봉과 전금문 일대를 포괄한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2호 안학궁성터
안학궁은 평양시 대성구역 안학동의 대성산 소문봉 남쪽 기슭에 위치한 고구려 궁이다. 427년(장수왕 15) 고구려가 수도를 중국 집안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긴 때부터, 586년(평원왕 28) 장안성으로 다시 도성을 옮길 때까지의 약 160년 간 고구려의 왕궁이었다. 현재는 성터만 남아 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3호 보통문
평양시 중구역 보통문동에 서있는 보통문은 6세기 중엽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 중성의 서문으로 처음 세워졌다. 보통문은 고려시대에도 서경의 서문으로 유지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473(성종 4)년에 중건 한 것으로 1644년, 1719년, 1777년과 그 이후에 계속 보수되었다. 상층의 문루는 정면3칸(14.8m), 측면 3칸(9.15m)으로 하층의 4개의 기둥이 그대로 상층으로 뻗는 통층 2층 누각이며 5량 구조의 팔작지붕으로 구성되어 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3호 보통문
평양시 중구역 보통문동에 서있는 보통문은 6세기 중엽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 중성의 서문으로 처음 세워졌다. 보통문은 고려시대에도 서경의 서문으로 유지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473(성종 4)년에 중건 한 것으로 1644년, 1719년, 1777년과 그 이후에 계속 보수되었다. 상층의 문루는 정면3칸(14.8m), 측면 3칸(9.15m)으로 하층의 4개의 기둥이 그대로 상층으로 뻗는 통층 2층 누각이며 5량 구조의 팔작지붕으로 구성되어 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3호 보통문
평양시 중구역 보통문동에 서있는 보통문은 6세기 중엽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 중성의 서문으로 처음 세워졌다. 보통문은 고려시대에도 서경의 서문으로 유지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473(성종 4)년에 중건 한 것으로 1644년, 1719년, 1777년과 그 이후에 계속 보수되었다. 상층의 문루는 정면3칸(14.8m), 측면 3칸(9.15m)으로 하층의 4개의 기둥이 그대로 상층으로 뻗는 통층 2층 누각이며 5량 구조의 팔작지붕으로 구성되어 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4호 대동문
평양시 중구역 대동문동에 있는 대동문은 고구려 평양성 내성의 동문이다. 고려시대인 947년(정종 2) 중건하였다가 거란족의 침입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그 후 다시 세웠으나 병자호란 때 또다시 소실되었다. 지금의 문루는 1635년(인조 13)에 중건한 것이다. 그 이후에 보수를 거듭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대동문은 중앙에 홍예문을 갖는 석축을 두고 그 위에 2층의 문루를 높이 올린 형식으로 정면3칸(15.91m) 측면3칸(10.34m)의 중층구조 겹처마 팔작지붕 형식으로 되어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4호 대동문
평양시 중구역 대동문동에 있는 대동문은 고구려 평양성 내성의 동문이다. 고려시대인 947년(정종 2) 중건하였다가 거란족의 침입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그 후 다시 세웠으나 병자호란 때 또다시 소실되었다. 지금의 문루는 1635년(인조 13)에 중건한 것이다. 그 이후에 보수를 거듭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대동문은 중앙에 홍예문을 갖는 석축을 두고 그 위에 2층의 문루를 높이 올린 형식으로 정면3칸(15.91m) 측면3칸(10.34m)의 중층구조 겹처마 팔작지붕 형식으로 되어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4호 대동문
평양시 중구역 대동문동에 있는 대동문은 고구려 평양성 내성의 동문이다. 고려시대인 947년(정종 2) 중건하였다가 거란족의 침입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그 후 다시 세웠으나 병자호란 때 또다시 소실되었다. 지금의 문루는 1635년(인조 13)에 중건한 것이다. 그 이후에 보수를 거듭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대동문은 중앙에 홍예문을 갖는 석축을 두고 그 위에 2층의 문루를 높이 올린 형식으로 정면3칸(15.91m) 측면3칸(10.34m)의 중층구조 겹처마 팔작지붕 형식으로 되어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4호 대동문
평양시 중구역 대동문동에 있는 대동문은 고구려 평양성 내성의 동문이다. 고려시대인 947년(정종 2) 중건하였다가 거란족의 침입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그 후 다시 세웠으나 병자호란 때 또다시 소실되었다. 지금의 문루는 1635년(인조 13)에 중건한 것이다. 그 이후에 보수를 거듭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대동문은 중앙에 홍예문을 갖는 석축을 두고 그 위에 2층의 문루를 높이 올린 형식으로 정면3칸(15.91m) 측면3칸(10.34m)의 중층구조 겹처마 팔작지붕 형식으로 되어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4호 대동문
평양시 중구역 대동문동에 있는 대동문은 고구려 평양성 내성의 동문이다. 고려시대인 947년(정종 2) 중건하였다가 거란족의 침입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그 후 다시 세웠으나 병자호란 때 또다시 소실되었다. 지금의 문루는 1635년(인조 13)에 중건한 것이다. 그 이후에 보수를 거듭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대동문은 중앙에 홍예문을 갖는 석축을 두고 그 위에 2층의 문루를 높이 올린 형식으로 정면3칸(15.91m) 측면3칸(10.34m)의 중층구조 겹처마 팔작지붕 형식으로 되어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5호 숭인전
평양시의 중심부인 중구역 종로동 장대재 기슭에 서있는 숭인전은 기자(箕子)를 모신 사당으로 고려시대인 1325년(충숙왕 12)에 기자사와 숭인전을 건립하였다. 조선 1428년(세종 10)에 중수를 시작하여, 1430년(세종 12)에 준공하였다. 후에 기자전으로 불리다가 1612년(광해군 4)에 숭인전으로 개칭되었다. 이후 다수의 중수를 거치면서, 원래는 본전 외에 좌우 행랑, 정문, 비각 등 부속건물을 포함하여 10여 채의 건물로 구성되었으나 현재는 본전만 남아 있다. 한국전쟁 당시 파손된 것을 1954년에 정전과 대문을 복원하였으며, 1977년 평양시 도시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정전이 숭령전 옆으로 이건 되었다. 숭인전은 정면3칸(12.97m) 측면3칸(8.72m) 규모의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이다. 전면어칸에는 ꡐ숭인전(崇仁殿)ꡑ 현판이 걸려있는데, 현판 좌측에는 ꡐ萬曆四十一年三月日宣賜ꡑ 으로 적혀있어 만력41년인 1613년(광해군 5) 3월에 사액(賜額)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5호 숭인전
평양시의 중심부인 중구역 종로동 장대재 기슭에 서있는 숭인전은 기자(箕子)를 모신 사당으로 고려시대인 1325년(충숙왕 12)에 기자사와 숭인전을 건립하였다. 조선 1428년(세종 10)에 중수를 시작하여, 1430년(세종 12)에 준공하였다. 후에 기자전으로 불리다가 1612년(광해군 4)에 숭인전으로 개칭되었다. 이후 다수의 중수를 거치면서, 원래는 본전 외에 좌우 행랑, 정문, 비각 등 부속건물을 포함하여 10여 채의 건물로 구성되었으나 현재는 본전만 남아 있다. 한국전쟁 당시 파손된 것을 1954년에 정전과 대문을 복원하였으며, 1977년 평양시 도시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정전이 숭령전 옆으로 이건 되었다. 숭인전은 정면3칸(12.97m) 측면3칸(8.72m) 규모의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이다. 전면어칸에는 ꡐ숭인전(崇仁殿)ꡑ 현판이 걸려있는데, 현판 좌측에는 ꡐ萬曆四十一年三月日宣賜ꡑ 으로 적혀있어 만력41년인 1613년(광해군 5) 3월에 사액(賜額)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6호 숭령전
숭령전은 평양시 중구역 종로동에 위치해 있다. 고조선을 건국한 단군과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왕을 제사지내던 조선시대의 사당으로 영숭전(永崇殿)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시 전소되었던 것을 1617년(광해군 9)에 중건하였고, 숭령전이라는 명칭은 1724년(영조 원년)에 사액 받아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1732년(영조 8)에 중수하였고, 1804년(순조 4)에 평양부내의 대화재로 상당부분 소실되었으나 곧 복구되었다. 지금의 숭령전은 이 시기의 건물로 추정되며 현재는 정전과 외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전은 정면 4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6호 숭령전
숭령전은 평양시 중구역 종로동에 위치해 있다. 고조선을 건국한 단군과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왕을 제사지내던 조선시대의 사당으로 영숭전(永崇殿)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시 전소되었던 것을 1617년(광해군 9)에 중건하였고, 숭령전이라는 명칭은 1724년(영조 원년)에 사액 받아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1732년(영조 8)에 중수하였고, 1804년(순조 4)에 평양부내의 대화재로 상당부분 소실되었으나 곧 복구되었다. 지금의 숭령전은 이 시기의 건물로 추정되며 현재는 정전과 외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전은 정면 4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6호 숭령전
숭령전은 평양시 중구역 종로동에 위치해 있다. 고조선을 건국한 단군과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왕을 제사지내던 조선시대의 사당으로 영숭전(永崇殿)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시 전소되었던 것을 1617년(광해군 9)에 중건하였고, 숭령전이라는 명칭은 1724년(영조 원년)에 사액 받아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1732년(영조 8)에 중수하였고, 1804년(순조 4)에 평양부내의 대화재로 상당부분 소실되었으나 곧 복구되었다. 지금의 숭령전은 이 시기의 건물로 추정되며 현재는 정전과 외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전은 정면 4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8호 대성산성
대성산성은 평양시 대성구역 대성산에 있는 고구려의 산성이다. 4세기 말, 5세기 초에 평양지역을 방위할 목적으로 지은 성으로, 427년(장수왕 15) 고구려가 수도를 중국 집안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긴 이후에는 왕궁인 안학궁을 지키기 위한 역할을 수행했다. 대성산성은 대성산 2개의 깊은 골짜기를 포함하고 소문봉, 을지봉, 장수봉, 북장대, 국사봉, 주작봉 등 6개의 봉우리 능선과 산허리를 둘러싼 타원형 산성이다. 성의 둘레는 7,076m이고, 성벽의 총길이는 겹성을 포함하여 9,284m에 이른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10호 대성산성남문
평양시 대성구역 대성산성에 있는 남문으로 1978년 9월 복원하였다. 고구려가 427년(장수왕 15) 수도를 중국 집안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이전에 세운 것으로, 높이는 19.5m이다. 대성산성 남문은 중앙에 홍예문을 갖는 석축을 두고 그 위에 2층의 문루를 높이 올린 형식으로 정면5칸(17.15m) 측면2칸(6.3m)의 중층구조이며, 겹처마 우진각지붕의 형식으로 되어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13호 영명사법운암
법운암은 평양시 만경대구역 용봉리 용악산에 있으며 영명사의 부속 암자이다. 고구려 때 창건되고 조선시대에 중수한 것으로 전해온다. 이 암자에는 현재 본전과 칠성각, 산신각, 독성각, 요사채 등 5동의 건물이 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13호 영명사법운암
법운암은 평양시 만경대구역 용봉리 용악산에 있으며 영명사의 부속 암자이다. 고구려 때 창건되고 조선시대에 중수한 것으로 전해온다. 이 암자에는 현재 본전과 칠성각, 산신각, 독성각, 요사채 등 5동의 건물이 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13호 영명사법운암
법운암은 평양시 만경대구역 용봉리 용악산에 있으며 영명사의 부속 암자이다. 고구려 때 창건되고 조선시대에 중수한 것으로 전해온다. 이 암자에는 현재 본전과 칠성각, 산신각, 독성각, 요사채 등 5동의 건물이 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13호 영명사법운암
법운암은 평양시 만경대구역 용봉리 용악산에 있으며 영명사의 부속 암자이다. 고구려 때 창건되고 조선시대에 중수한 것으로 전해온다. 이 암자에는 현재 본전과 칠성각, 산신각, 독성각, 요사채 등 5동의 건물이 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14호 룡곡서원
용곡서원은 평양시 용악산(292m)의 남쪽 기슭에 위치해 있다. 용곡서원은 조선 1658년(효종 9)에 이 지방 출신 유학자 돈암 선우협(1588~1653)을 추모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창건된 서원으로, 1713년에 고쳐 세운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 현재는 사당과 문루를 비롯하여 내삼문과 동재, 서재, 그리고 비각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당은 정면3칸(8.55m) 측면3칸(5.96m)의 규모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15호 룡산리고구려무덤떼
평양시 역포구역 용산리의 제련산 남쪽 기슭에 있는 고구려 고분군으로 국보유적 36호인 전(傳)동명왕릉을 중심으로 그 뒤에 9기의 고분들이 있으며, 동남쪽 설매동릉선에 5기의 고분들이 있다. 그 중 벽화고분은 3기로 (전)동명왕릉과 국보유적 180호인 진파리4호 고분, 국보유적 181호인 진파리1호 고분이 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15호 룡산리고구려무덤떼
평양시 역포구역 용산리의 제련산 남쪽 기슭에 있는 고구려 고분군으로 국보유적 36호인 전(傳)동명왕릉을 중심으로 그 뒤에 9기의 고분들이 있으며, 동남쪽 설매동릉선에 5기의 고분들이 있다. 그 중 벽화고분은 3기로 (전)동명왕릉과 국보유적 180호인 진파리4호 고분, 국보유적 181호인 진파리1호 고분이 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15호 룡산리고구려무덤떼
평양시 역포구역 용산리의 제련산 남쪽 기슭에 있는 고구려 고분군으로 국보유적 36호인 전(傳)동명왕릉을 중심으로 그 뒤에 9기의 고분들이 있으며, 동남쪽 설매동릉선에 5기의 고분들이 있다. 그 중 벽화고분은 3기로 (전)동명왕릉과 국보유적 180호인 진파리4호 고분, 국보유적 181호인 진파리1호 고분이 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15호 룡산리고구려무덤떼
평양시 역포구역 용산리의 제련산 남쪽 기슭에 있는 고구려 고분군으로 국보유적 36호인 전(傳)동명왕릉을 중심으로 그 뒤에 9기의 고분들이 있으며, 동남쪽 설매동릉선에 5기의 고분들이 있다. 그 중 벽화고분은 3기로 (전)동명왕릉과 국보유적 180호인 진파리4호 고분, 국보유적 181호인 진파리1호 고분이 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15호 룡산리고구려무덤떼
평양시 역포구역 용산리의 제련산 남쪽 기슭에 있는 고구려 고분군으로 국보유적 36호인 전(傳)동명왕릉을 중심으로 그 뒤에 9기의 고분들이 있으며, 동남쪽 설매동릉선에 5기의 고분들이 있다. 그 중 벽화고분은 3기로 (전)동명왕릉과 국보유적 180호인 진파리4호 고분, 국보유적 181호인 진파리1호 고분이 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16호 연광정
연광정은 고구려 평양성 내성의 동쪽 장대로 6세기 중엽에 처음 세워졌으며, 1111년(예종 6) 이 자리에 누정을 다시 짓고 ꡐ산수정ꡑ이라 하였다. 그 후 조선시대인 16세기에 수차례에 걸쳐 누정을 중수하였으며 이 후 임진왜란의 병화로 인해 소실된 것을 1608년(선조 29)부터 1860년(철종 11)에 중창하였는데 그 건물이 지금까지 전한다. 연광정은 대동강가에 위치하여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와 어우러져 관서 8경의 하나로 알려져 왔다. 연광정에는 ꡐ천하제일강산ꡑ, ꡐ제일루대ꡑ, ꡐ만화루ꡑ라는 현판이 전하고 고려 때의 시인 김황원이 부벽루에 올라 대동강을 바라보며 쓴 시의 편액이 또한 걸려 있다. 연광정은 두 개의 장방형 평면의 누정이 ᄀ자형 형태로 비스듬히 어긋나게 붙은 형태를 이루고 있다. 본래 정면3칸(11.3m) 측면3칸(9.2m)의 남쪽채만 있었는데 1573년(선조 6)에 정면 2칸, 측면 4칸의 장방형 평면을 북측 면에 잇대어 지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16호 연광정
연광정은 고구려 평양성 내성의 동쪽 장대로 6세기 중엽에 처음 세워졌으며, 1111년(예종 6) 이 자리에 누정을 다시 짓고 ꡐ산수정ꡑ이라 하였다. 그 후 조선시대인 16세기에 수차례에 걸쳐 누정을 중수하였으며 이 후 임진왜란의 병화로 인해 소실된 것을 1608년(선조 29)부터 1860년(철종 11)에 중창하였는데 그 건물이 지금까지 전한다. 연광정은 대동강가에 위치하여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와 어우러져 관서 8경의 하나로 알려져 왔다. 연광정에는 ꡐ천하제일강산ꡑ, ꡐ제일루대ꡑ, ꡐ만화루ꡑ라는 현판이 전하고 고려 때의 시인 김황원이 부벽루에 올라 대동강을 바라보며 쓴 시의 편액이 또한 걸려 있다. 연광정은 두 개의 장방형 평면의 누정이 ᄀ자형 형태로 비스듬히 어긋나게 붙은 형태를 이루고 있다. 본래 정면3칸(11.3m) 측면3칸(9.2m)의 남쪽채만 있었는데 1573년(선조 6)에 정면 2칸, 측면 4칸의 장방형 평면을 북측 면에 잇대어 지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16호 연광정
연광정은 고구려 평양성 내성의 동쪽 장대로 6세기 중엽에 처음 세워졌으며, 1111년(예종 6) 이 자리에 누정을 다시 짓고 ꡐ산수정ꡑ이라 하였다. 그 후 조선시대인 16세기에 수차례에 걸쳐 누정을 중수하였으며 이 후 임진왜란의 병화로 인해 소실된 것을 1608년(선조 29)부터 1860년(철종 11)에 중창하였는데 그 건물이 지금까지 전한다. 연광정은 대동강가에 위치하여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와 어우러져 관서 8경의 하나로 알려져 왔다. 연광정에는 ꡐ천하제일강산ꡑ, ꡐ제일루대ꡑ, ꡐ만화루ꡑ라는 현판이 전하고 고려 때의 시인 김황원이 부벽루에 올라 대동강을 바라보며 쓴 시의 편액이 또한 걸려 있다. 연광정은 두 개의 장방형 평면의 누정이 ᄀ자형 형태로 비스듬히 어긋나게 붙은 형태를 이루고 있다. 본래 정면3칸(11.3m) 측면3칸(9.2m)의 남쪽채만 있었는데 1573년(선조 6)에 정면 2칸, 측면 4칸의 장방형 평면을 북측 면에 잇대어 지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16호 연광정
연광정은 고구려 평양성 내성의 동쪽 장대로 6세기 중엽에 처음 세워졌으며, 1111년(예종 6) 이 자리에 누정을 다시 짓고 ꡐ산수정ꡑ이라 하였다. 그 후 조선시대인 16세기에 수차례에 걸쳐 누정을 중수하였으며 이 후 임진왜란의 병화로 인해 소실된 것을 1608년(선조 29)부터 1860년(철종 11)에 중창하였는데 그 건물이 지금까지 전한다. 연광정은 대동강가에 위치하여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와 어우러져 관서 8경의 하나로 알려져 왔다. 연광정에는 ꡐ천하제일강산ꡑ, ꡐ제일루대ꡑ, ꡐ만화루ꡑ라는 현판이 전하고 고려 때의 시인 김황원이 부벽루에 올라 대동강을 바라보며 쓴 시의 편액이 또한 걸려 있다. 연광정은 두 개의 장방형 평면의 누정이 ᄀ자형 형태로 비스듬히 어긋나게 붙은 형태를 이루고 있다. 본래 정면3칸(11.3m) 측면3칸(9.2m)의 남쪽채만 있었는데 1573년(선조 6)에 정면 2칸, 측면 4칸의 장방형 평면을 북측 면에 잇대어 지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16호 연광정
연광정은 고구려 평양성 내성의 동쪽 장대로 6세기 중엽에 처음 세워졌으며, 1111년(예종 6) 이 자리에 누정을 다시 짓고 ꡐ산수정ꡑ이라 하였다. 그 후 조선시대인 16세기에 수차례에 걸쳐 누정을 중수하였으며 이 후 임진왜란의 병화로 인해 소실된 것을 1608년(선조 29)부터 1860년(철종 11)에 중창하였는데 그 건물이 지금까지 전한다. 연광정은 대동강가에 위치하여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와 어우러져 관서 8경의 하나로 알려져 왔다. 연광정에는 ꡐ천하제일강산ꡑ, ꡐ제일루대ꡑ, ꡐ만화루ꡑ라는 현판이 전하고 고려 때의 시인 김황원이 부벽루에 올라 대동강을 바라보며 쓴 시의 편액이 또한 걸려 있다. 연광정은 두 개의 장방형 평면의 누정이 ᄀ자형 형태로 비스듬히 어긋나게 붙은 형태를 이루고 있다. 본래 정면3칸(11.3m) 측면3칸(9.2m)의 남쪽채만 있었는데 1573년(선조 6)에 정면 2칸, 측면 4칸의 장방형 평면을 북측 면에 잇대어 지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16호 연광정
연광정은 고구려 평양성 내성의 동쪽 장대로 6세기 중엽에 처음 세워졌으며, 1111년(예종 6) 이 자리에 누정을 다시 짓고 ꡐ산수정ꡑ이라 하였다. 그 후 조선시대인 16세기에 수차례에 걸쳐 누정을 중수하였으며 이 후 임진왜란의 병화로 인해 소실된 것을 1608년(선조 29)부터 1860년(철종 11)에 중창하였는데 그 건물이 지금까지 전한다. 연광정은 대동강가에 위치하여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와 어우러져 관서 8경의 하나로 알려져 왔다. 연광정에는 ꡐ천하제일강산ꡑ, ꡐ제일루대ꡑ, ꡐ만화루ꡑ라는 현판이 전하고 고려 때의 시인 김황원이 부벽루에 올라 대동강을 바라보며 쓴 시의 편액이 또한 걸려 있다. 연광정은 두 개의 장방형 평면의 누정이 ᄀ자형 형태로 비스듬히 어긋나게 붙은 형태를 이루고 있다. 본래 정면3칸(11.3m) 측면3칸(9.2m)의 남쪽채만 있었는데 1573년(선조 6)에 정면 2칸, 측면 4칸의 장방형 평면을 북측 면에 잇대어 지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16호 연광정
연광정은 고구려 평양성 내성의 동쪽 장대로 6세기 중엽에 처음 세워졌으며, 1111년(예종 6) 이 자리에 누정을 다시 짓고 ꡐ산수정ꡑ이라 하였다. 그 후 조선시대인 16세기에 수차례에 걸쳐 누정을 중수하였으며 이 후 임진왜란의 병화로 인해 소실된 것을 1608년(선조 29)부터 1860년(철종 11)에 중창하였는데 그 건물이 지금까지 전한다. 연광정은 대동강가에 위치하여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와 어우러져 관서 8경의 하나로 알려져 왔다. 연광정에는 ꡐ천하제일강산ꡑ, ꡐ제일루대ꡑ, ꡐ만화루ꡑ라는 현판이 전하고 고려 때의 시인 김황원이 부벽루에 올라 대동강을 바라보며 쓴 시의 편액이 또한 걸려 있다. 연광정은 두 개의 장방형 평면의 누정이 ᄀ자형 형태로 비스듬히 어긋나게 붙은 형태를 이루고 있다. 본래 정면3칸(11.3m) 측면3칸(9.2m)의 남쪽채만 있었는데 1573년(선조 6)에 정면 2칸, 측면 4칸의 장방형 평면을 북측 면에 잇대어 지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17호 부벽루
부벽루는 평양시 중구역 경산동에 위치한 조선시대의 건물로서, 금수산 모란봉의 동쪽, 대동강가에 깎아지른 듯 솟아 오른 청류벽 위에 세워진 누정이다. 393년(광개토왕 3)에 건립한 것을 1614년에 재건하였다. 부벽루는 고구려 때인 393년에 세워진 영명사의 부속 건물로 초창되었으며, 영명루라고 불렀다. 그 후 12세기에 이르러 대동강의 맑고 푸른 물위에 떠 있는 듯한 누정이라는 뜻에서 부벽루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부벽루는 창건이후 수차례의 재건과 보수를 거듭하였는데, 지금의 누정은 고려시대 중창된 건물이 임진왜란 때 병화로 소실되면서 1614년(광해군 6)에 재건한 것이다. 부벽루는 정면 5칸(14.58m) 측면3칸(7.68m) 규모의 5량가 구조로 부연이 있는 겹처마 팔작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18호 칠성문
평양시 중구역 경상동에 있는 칠성문은 6세기 중엽 고구려 평양성 내성의 북문으로 처음 세워졌다. 칠성문이란 북두칠성에서 유래하여 북문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후 성문의 위치는 유지되었지만, 문루는 1711년(숙종 37)과 1764년(영조 40)에 중건된 기록이 있어 이 시기의 것으로 보인다. 칠성문의 문루는 정면3칸(7.38m) 측면2칸(4.36m)의 단층 팔작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19호 을밀대
평양시 중구역 금수산의 을밀봉에 있는 을밀대는 6세기 중엽 고구려시기에 평양성 내성의 북쪽 장대로 처음 세워진 누정이다. 을밀대는 내성이 북쪽에 가장 멀리 뻗어나간 모서리에 위치하는데, “사허정”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누정은 1714년에 축대를 보수하면서 고쳐지었으며, 그 후 여러 차례에 보수하였다. 을밀대는 높이 11m의 축대와 그 위에 세운 누정으로 이루어졌다. 축대의 원형은 고구려 때의 것을 유지하고 있다. 누정은 정면3칸(7.46m) 측면2칸(5.29m)의 단층팔작집이다. 을밀대 주위의 아름다운 경치는 “을밀상춘(을밀대의 봄맞이)”으로 일찍부터 백성들의 사랑을 받아 평양8경의 하나로 알려져 왔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19호 을밀대
평양시 중구역 금수산의 을밀봉에 있는 을밀대는 6세기 중엽 고구려시기에 평양성 내성의 북쪽 장대로 처음 세워진 누정이다. 을밀대는 내성이 북쪽에 가장 멀리 뻗어나간 모서리에 위치하는데, “사허정”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누정은 1714년에 축대를 보수하면서 고쳐지었으며, 그 후 여러 차례에 보수하였다. 을밀대는 높이 11m의 축대와 그 위에 세운 누정으로 이루어졌다. 축대의 원형은 고구려 때의 것을 유지하고 있다. 누정은 정면3칸(7.46m) 측면2칸(5.29m)의 단층팔작집이다. 을밀대 주위의 아름다운 경치는 “을밀상춘(을밀대의 봄맞이)”으로 일찍부터 백성들의 사랑을 받아 평양8경의 하나로 알려져 왔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20호 청류정
청류정은 평양시 금수산 청류벽 위에 세워져 주변의 자연경관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한 누정이다. 본래 청류정 자리에는 고구려 평양성의 동측 장대가 자리 잡고 있었으며, 청류정 건물은 고구려시기에 처음 세우고 조선시대에 다시 세운 평양성 내성의 서문인 정해문의 문루를 옮겨다가 누정으로 고쳐 세운 것이라 한다. 정해문은 조선시대에 평양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면서 1716년(숙종 42)에 중수하였다고 한다. 그 후 평양에서 정해문을 해체하고 그 문루를 지금의 위치에 옮겨 세운 것은 60여년전의 일로 이 때 이 건물을 청류벽 위에 세웠다 하여 그 이름을 청류정이라 부른다고 한다. 청류정은 정면3칸(11.08m) 측면2칸(6.2m)의 팔작지붕의 단층 누정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21호 최승대
최승대는 평양시 중구역 경상동 금수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인 모란봉에 자리한 누정이다. 최승대가 있는 자리는 본래 고구려 6세기 중엽에 쌓은 평양성 북성의 북쪽 장대터였다. 이후 조선 후기 1714년(숙종 40)에 수축공사를 하면서 10m 가량 돋우어 이 자리에 봉화대를 설치하였다. 1716년(숙종 42)에는 산마루에서 약 60m 가량 내려와 양지바른 곳에 오승대란 누정이 세워졌다. 누정은 1849년(헌종 15) 중건되었으며, 청류정의 이전과 함께 최승대도 1940년경 봉화대의 위치였던 현재의 위치에 옮겨졌으며, 최근까지 수차례의 보수작업이 있었다. 최승대는 높은 축대 위에 성가퀴를 돌리고, 그 안에 세운 정면3칸(7.36m)/ 측면2칸(4.67m)의 단층 겹처마 팔작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21호 최승대
최승대는 평양시 중구역 경상동 금수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인 모란봉에 자리한 누정이다. 최승대가 있는 자리는 본래 고구려 6세기 중엽에 쌓은 평양성 북성의 북쪽 장대터였다. 이후 조선 후기 1714년(숙종 40)에 수축공사를 하면서 10m 가량 돋우어 이 자리에 봉화대를 설치하였다. 1716년(숙종 42)에는 산마루에서 약 60m 가량 내려와 양지바른 곳에 오승대란 누정이 세워졌다. 누정은 1849년(헌종 15) 중건되었으며, 청류정의 이전과 함께 최승대도 1940년경 봉화대의 위치였던 현재의 위치에 옮겨졌으며, 최근까지 수차례의 보수작업이 있었다. 최승대는 높은 축대 위에 성가퀴를 돌리고, 그 안에 세운 정면3칸(7.36m)/ 측면2칸(4.67m)의 단층 겹처마 팔작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21호 최승대
최승대는 평양시 중구역 경상동 금수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인 모란봉에 자리한 누정이다. 최승대가 있는 자리는 본래 고구려 6세기 중엽에 쌓은 평양성 북성의 북쪽 장대터였다. 이후 조선 후기 1714년(숙종 40)에 수축공사를 하면서 10m 가량 돋우어 이 자리에 봉화대를 설치하였다. 1716년(숙종 42)에는 산마루에서 약 60m 가량 내려와 양지바른 곳에 오승대란 누정이 세워졌다. 누정은 1849년(헌종 15) 중건되었으며, 청류정의 이전과 함께 최승대도 1940년경 봉화대의 위치였던 현재의 위치에 옮겨졌으며, 최근까지 수차례의 보수작업이 있었다. 최승대는 높은 축대 위에 성가퀴를 돌리고, 그 안에 세운 정면3칸(7.36m)/ 측면2칸(4.67m)의 단층 겹처마 팔작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23호 평양종
평양의 중구역 대동문동 대동문 옆에 걸려있는 평양종은 1726년에 제작된 조선시대 범종이다. 종의 무게는 2만2천5백2십근 15량(12t 914kg) 정도이며, 높이 310cm이다. 종의 재료는 평양성내 백성들로부터 거두어들인 주철, 생동, 유기, 철 등이다. 이 평양종은 당시 객사였던 대동관 앞에 종각을 설치하고 걸었다. 지금의 종각은 1827년에 고쳐지은 것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23호 평양종
평양의 중구역 대동문동 대동문 옆에 걸려있는 평양종은 1726년에 제작된 조선시대 범종이다. 종의 무게는 2만2천5백2십근 15량(12t 914kg) 정도이며, 높이 310cm이다. 종의 재료는 평양성내 백성들로부터 거두어들인 주철, 생동, 유기, 철 등이다. 이 평양종은 당시 객사였던 대동관 앞에 종각을 설치하고 걸었다. 지금의 종각은 1827년에 고쳐지은 것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23호 평양종
평양의 중구역 대동문동 대동문 옆에 걸려있는 평양종은 1726년에 제작된 조선시대 범종이다. 종의 무게는 2만2천5백2십근 15량(12t 914kg) 정도이며, 높이 310cm이다. 종의 재료는 평양성내 백성들로부터 거두어들인 주철, 생동, 유기, 철 등이다. 이 평양종은 당시 객사였던 대동관 앞에 종각을 설치하고 걸었다. 지금의 종각은 1827년에 고쳐지은 것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24호 흥복사6각7층탑
평양시 평천구역 평천동 홍복사 터에 있던 고려시대 석탑이다. 여러 차례 옮겨진 이후, 현재는 평양시 모란봉구역 개선동 용화사 앞뜰에 자리하고 있다. 탑의 높이 5.35m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26호 호남리사신무덤
평양시 삼석구역 호남리에 있는 5세기 말~6세기 초에 조성된 고구려시대의 무덤이다. 이 고분은 외칸무덤(단실묘)으로 남쪽을 향하고 있으며 무덤칸(묘실)은 안길(연도)과 안칸(현실)으로 이루어진다. 안칸은 가로로 긴 장방형이며 그 크기는 대략 동서 3.6m, 남북 3.1m, 높이 3m가량이다. 큰 대리석을 잘 다듬어 다섯 돌기로 쌓은 네 벽면에 사신이 그려져 있는데 벽화는 돌 위에 직접 그려진 것이다. 호남리사신총은 200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26호 호남리사신무덤
평양시 삼석구역 호남리에 있는 5세기 말~6세기 초에 조성된 고구려시대의 무덤이다. 이 고분은 외칸무덤(단실묘)으로 남쪽을 향하고 있으며 무덤칸(묘실)은 안길(연도)과 안칸(현실)으로 이루어진다. 안칸은 가로로 긴 장방형이며 그 크기는 대략 동서 3.6m, 남북 3.1m, 높이 3m가량이다. 큰 대리석을 잘 다듬어 다섯 돌기로 쌓은 네 벽면에 사신이 그려져 있는데 벽화는 돌 위에 직접 그려진 것이다. 호남리사신총은 200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26호 호남리사신무덤
평양시 삼석구역 호남리에 있는 5세기 말~6세기 초에 조성된 고구려시대의 무덤이다. 이 고분은 외칸무덤(단실묘)으로 남쪽을 향하고 있으며 무덤칸(묘실)은 안길(연도)과 안칸(현실)으로 이루어진다. 안칸은 가로로 긴 장방형이며 그 크기는 대략 동서 3.6m, 남북 3.1m, 높이 3m가량이다. 큰 대리석을 잘 다듬어 다섯 돌기로 쌓은 네 벽면에 사신이 그려져 있는데 벽화는 돌 위에 직접 그려진 것이다. 호남리사신총은 200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28호 강서세무덤
남포직특별시 강서구역에 있는 7세기 중엽 고구려시대의 벽화 고분이다. 3개의 돌칸흙무덤(석실봉토분-石室封土墳)이 모여 있어 이 고장을 삼묘리라 부른다. 무덤군의 남쪽이 강서대묘, 그 뒤에 나란히 있는 무덤 중 서쪽 무덤이 강서중묘, 동쪽이 강서소묘이다. 강서대묘는 봉분 직경이 51.6m, 높이가 8.86m에 이르는 대형 석실봉토분으로 진흙과 석회를 번갈아 다져 방대형으로 쌓아올렸다. 내부는 화강암 판석으로 만들었으며 안길(연도)과 안칸(현실)으로 이루어진 남향의 외방무덤(단실묘)이다. 안길은 길이 약 3m, 폭 1.8m, 높이 1.7m이다. 안칸은 정방형으로 남북 길이 3.18m, 동서 폭 3.15m, 높이 3.5m이다. 강서대묘의 현무도와 청룡도는 고구려는 물론 당시 동방 사신미술을 대표하는 걸작품으로 꼽힌다. 강서 중묘는 벽면에 사신도가 그려져 있는 단실묘로 강서대묘와 함께 고구려 후기 벽화 고분을 대표한다. 강서중묘는 강서대묘에 비하여 벽화 표현기법의 양식화가 뚜렷하고 묘실구조도 보다 간략화된 것으로 보아 6세기 말~7세기에 해당한다. 강서소묘는 한 칸짜리 돌칸흙무덤(석실봉토분-石室封土墳)이다. 소묘의 무덤 입구는 원형이고, 기저부의 지름은 약 40.9m, 높이는 약 6.81m이며, 무덤의 구조는 안칸 남벽의 중앙에 달린 안길(연도)과 평면이 방형인 널방(현실)으로 이루어졌다. 고구려 말기와 가까운 시기에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강서세무덤은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28호 강서세무덤
남포직특별시 강서구역에 있는 7세기 중엽 고구려시대의 벽화 고분이다. 3개의 돌칸흙무덤(석실봉토분-石室封土墳)이 모여 있어 이 고장을 삼묘리라 부른다. 무덤군의 남쪽이 강서대묘, 그 뒤에 나란히 있는 무덤 중 서쪽 무덤이 강서중묘, 동쪽이 강서소묘이다. 강서대묘는 봉분 직경이 51.6m, 높이가 8.86m에 이르는 대형 석실봉토분으로 진흙과 석회를 번갈아 다져 방대형으로 쌓아올렸다. 내부는 화강암 판석으로 만들었으며 안길(연도)과 안칸(현실)으로 이루어진 남향의 외방무덤(단실묘)이다. 안길은 길이 약 3m, 폭 1.8m, 높이 1.7m이다. 안칸은 정방형으로 남북 길이 3.18m, 동서 폭 3.15m, 높이 3.5m이다. 강서대묘의 현무도와 청룡도는 고구려는 물론 당시 동방 사신미술을 대표하는 걸작품으로 꼽힌다. 강서 중묘는 벽면에 사신도가 그려져 있는 단실묘로 강서대묘와 함께 고구려 후기 벽화 고분을 대표한다. 강서중묘는 강서대묘에 비하여 벽화 표현기법의 양식화가 뚜렷하고 묘실구조도 보다 간략화된 것으로 보아 6세기 말~7세기에 해당한다. 강서소묘는 한 칸짜리 돌칸흙무덤(석실봉토분-石室封土墳)이다. 소묘의 무덤 입구는 원형이고, 기저부의 지름은 약 40.9m, 높이는 약 6.81m이며, 무덤의 구조는 안칸 남벽의 중앙에 달린 안길(연도)과 평면이 방형인 널방(현실)으로 이루어졌다. 고구려 말기와 가까운 시기에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강서세무덤은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29호 약수리벽화무덤
남포특별시 강서구역 약수리의 5세기 초 고구려의 벽화고분이다. 안칸 벽화의 주제는 주인공 부부의 실내생활과 사신이다. 앞칸에는 주인공의 대형 행렬도, 대규모의 사냥그림, 마굿간, 부엌, 방앗간, 문지기장수, 외양간, 주인공의 실내생활, 시중군들의 움직임등을 보여주는 그림이 있다. 북벽에는 주인공 부부의 실내생활과 현무, 동벽에는 청룡과 해, 서벽에는 백호와 달, 남벽에는 주작을 각각 배치하였으며, 각 벽에는 구름무늬와 별자리들을 그렸는데 그 중 북벽에는 북두칠성이 있다.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30호 수산리벽화무덤
남포특별시 강서구역 수산리에서 서남쪽 4km되는 고정산에 자리하고 있는 고분이다. 이 고분은 고구려 귀족의 생활모습을 담은 인물풍속도를 그린 외칸 무덤(단실묘)이다. 수산리벽화고분의 축조연대는 5세기 후반경으로 추정된다.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30호 수산리벽화무덤
남포특별시 강서구역 수산리에서 서남쪽 4km되는 고정산에 자리하고 있는 고분이다. 이 고분은 고구려 귀족의 생활모습을 담은 인물풍속도를 그린 외칸 무덤(단실묘)이다. 수산리벽화고분의 축조연대는 5세기 후반경으로 추정된다.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31호 백상루
백상루는 평안남도 안주시 안주읍성 서북쪽에 서있는 장대이다. 청천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해 관서8경의 하나로 ꡐ관서제일루ꡑ로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며 내려왔다. 백상루란 여기서 백 가지 절경을 볼 수 있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안주성은 고구려의 석성으로 조선 시대인 1753년 읍성이 완성 되면서 고쳐지어졌는데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 고지로 알려져 있다. 한국전쟁 당시 폭격에 불탄 것을 1977년 서쪽으로 약 400m 옮겨 세웠다. 백상루는 T형 평면의 누정인데 정면7칸(25.8m) 측면4칸(12.2m)의 본채에 정면 6칸(18.4m), 측면 2칸의 곁채를 직각으로 붙여지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32호 강선루(동명관)
평안남도 성천군 성천읍에 있는 강선루는 성천객사 안에 위치해 사신들의 연회장으로 사용했던 건물이다. 성천객사는 1343년에 창건되었으나 그 후 1613년에 불 탄 것을 1616년에 다시 세우고 1766년에도 화재로 소실된 것을 1768년에 다시 지었다고 한다. 당시의 객사는 모두 337칸에 달하는 10여 채의 건물로 이루어 졌으나 현재는 문루인 방선문만 남아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33호 훈련정
훈련정은 평안남도 평원군 평원읍 동쪽의 미두산 기슭에 자리한 누정이다. 평원의 진산인 미두산에는 산성과 봉수대가 있어 이 일대는 국가방위의 주요 기지로 사용되었다. 이 누정은 “훈련정”이라는 이름처럼 군인들이 무술을 연마하거나 사열할 때 쓰던 건물이다. 평면은 정면5칸(15.3m) 측면4칸(10.4m)의 규모이고 7량가에 초익공을 얹었으며 팔작지붕 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34호 안국사
안국사는 평안남도 평성시 봉학동 봉린산에 있으며 조선시대 후기에 재건한 사찰이다. 503년(천감 2년) 법석 현구가 20여 년간에 걸쳐 창건한 절로 전해진다. 현재는 주불전인 대웅보전, 태평루, 요사채, 주필대 등만이 남아 있으며 태평루 앞에는 고려시대 작품인 9층석탑이 남아 있다. 대웅보전은 안국사의 주불전으로 정면 5칸, 측면 4칸의 중층건물이며, 다포형식의 팔작지붕을 가진 건물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34호 안국사
안국사는 평안남도 평성시 봉학동 봉린산에 있으며 조선시대 후기에 재건한 사찰이다. 503년(천감 2년) 법석 현구가 20여 년간에 걸쳐 창건한 절로 전해진다. 현재는 주불전인 대웅보전, 태평루, 요사채, 주필대 등만이 남아 있으며 태평루 앞에는 고려시대 작품인 9층석탑이 남아 있다. 대웅보전은 안국사의 주불전으로 정면 5칸, 측면 4칸의 중층건물이며, 다포형식의 팔작지붕을 가진 건물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34호 안국사
안국사는 평안남도 평성시 봉학동 봉린산에 있으며 조선시대 후기에 재건한 사찰이다. 503년(천감 2년) 법석 현구가 20여 년간에 걸쳐 창건한 절로 전해진다. 현재는 주불전인 대웅보전, 태평루, 요사채, 주필대 등만이 남아 있으며 태평루 앞에는 고려시대 작품인 9층석탑이 남아 있다. 대웅보전은 안국사의 주불전으로 정면 5칸, 측면 4칸의 중층건물이며, 다포형식의 팔작지붕을 가진 건물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34호 안국사
안국사는 평안남도 평성시 봉학동 봉린산에 있으며 조선시대 후기에 재건한 사찰이다. 503년(천감 2년) 법석 현구가 20여 년간에 걸쳐 창건한 절로 전해진다. 현재는 주불전인 대웅보전, 태평루, 요사채, 주필대 등만이 남아 있으며 태평루 앞에는 고려시대 작품인 9층석탑이 남아 있다. 대웅보전은 안국사의 주불전으로 정면 5칸, 측면 4칸의 중층건물이며, 다포형식의 팔작지붕을 가진 건물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34호 안국사
안국사는 평안남도 평성시 봉학동 봉린산에 있으며 조선시대 후기에 재건한 사찰이다. 503년(천감 2년) 법석 현구가 20여 년간에 걸쳐 창건한 절로 전해진다. 현재는 주불전인 대웅보전, 태평루, 요사채, 주필대 등만이 남아 있으며 태평루 앞에는 고려시대 작품인 9층석탑이 남아 있다. 대웅보전은 안국사의 주불전으로 정면 5칸, 측면 4칸의 중층건물이며, 다포형식의 팔작지붕을 가진 건물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34호 안국사
안국사는 평안남도 평성시 봉학동 봉린산에 있으며 조선시대 후기에 재건한 사찰이다. 503년(천감 2년) 법석 현구가 20여 년간에 걸쳐 창건한 절로 전해진다. 현재는 주불전인 대웅보전, 태평루, 요사채, 주필대 등만이 남아 있으며 태평루 앞에는 고려시대 작품인 9층석탑이 남아 있다. 대웅보전은 안국사의 주불전으로 정면 5칸, 측면 4칸의 중층건물이며, 다포형식의 팔작지붕을 가진 건물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34호 안국사
안국사는 평안남도 평성시 봉학동 봉린산에 있으며 조선시대 후기에 재건한 사찰이다. 503년(천감 2년) 법석 현구가 20여 년간에 걸쳐 창건한 절로 전해진다. 현재는 주불전인 대웅보전, 태평루, 요사채, 주필대 등만이 남아 있으며 태평루 앞에는 고려시대 작품인 9층석탑이 남아 있다. 대웅보전은 안국사의 주불전으로 정면 5칸, 측면 4칸의 중층건물이며, 다포형식의 팔작지붕을 가진 건물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34호 안국사
안국사는 평안남도 평성시 봉학동 봉린산에 있으며 조선시대 후기에 재건한 사찰이다. 503년(천감 2년) 법석 현구가 20여 년간에 걸쳐 창건한 절로 전해진다. 현재는 주불전인 대웅보전, 태평루, 요사채, 주필대 등만이 남아 있으며 태평루 앞에는 고려시대 작품인 9층석탑이 남아 있다. 대웅보전은 안국사의 주불전으로 정면 5칸, 측면 4칸의 중층건물이며, 다포형식의 팔작지붕을 가진 건물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34호 안국사
안국사는 평안남도 평성시 봉학동 봉린산에 있으며 조선시대 후기에 재건한 사찰이다. 503년(천감 2년) 법석 현구가 20여 년간에 걸쳐 창건한 절로 전해진다. 현재는 주불전인 대웅보전, 태평루, 요사채, 주필대 등만이 남아 있으며 태평루 앞에는 고려시대 작품인 9층석탑이 남아 있다. 대웅보전은 안국사의 주불전으로 정면 5칸, 측면 4칸의 중층건물이며, 다포형식의 팔작지붕을 가진 건물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35호 성천객사(방선문)
평안남도 성천군 성천읍에 있는 방선문은 성천객사의 문루이다. 성천객사는 1343년에 창건되었으나 그 후 1613년에 불 탄 것을 1616년에 다시 세우고 1766년에도 화재로 소실된 것을 1768년에 다시 지었다고 한다. 당시의 객사는 모두 337칸에 달하는 10여 채의 건물로 이루어 졌으나 현재는 문루인 방선문만 남아있다. 방선문은 송객정 혹은 망경루로 불리는데 1690년에 창건하여 1727년에 개건한 이후 수차례 고쳐 지은 건물이다. 방선문은 중층의 누각으로 정면3칸(10.6m) 측면2칸(5.65m)에 익공을 올린 겹처마 팔작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35호 성천객사(방선문)
평안남도 성천군 성천읍에 있는 방선문은 성천객사의 문루이다. 성천객사는 1343년에 창건되었으나 그 후 1613년에 불 탄 것을 1616년에 다시 세우고 1766년에도 화재로 소실된 것을 1768년에 다시 지었다고 한다. 당시의 객사는 모두 337칸에 달하는 10여 채의 건물로 이루어 졌으나 현재는 문루인 방선문만 남아있다. 방선문은 송객정 혹은 망경루로 불리는데 1690년에 창건하여 1727년에 개건한 이후 수차례 고쳐 지은 건물이다. 방선문은 중층의 누각으로 정면3칸(10.6m) 측면2칸(5.65m)에 익공을 올린 겹처마 팔작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36호 동명왕릉
평양특별시 력포구역 용산리에 있는 이 능은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릉으로 고구려가 427년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함께 옮겨 이 곳에 위치하게 되었다고 북한에서 주장하는 무덤이다. 현재의 모습은 1993년 대대적인 개건한 것이다. 무덤은 봉분의 돌기단, 안칸의 꺾음식천정, 연꽃무늬만으로 된 벽화 내용으로 미루어 4세기 말~5세기 초의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36호 동명왕릉
평양특별시 력포구역 용산리에 있는 이 능은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릉으로 고구려가 427년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함께 옮겨 이 곳에 위치하게 되었다고 북한에서 주장하는 무덤이다. 현재의 모습은 1993년 대대적인 개건한 것이다. 무덤은 봉분의 돌기단, 안칸의 꺾음식천정, 연꽃무늬만으로 된 벽화 내용으로 미루어 4세기 말~5세기 초의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36호 동명왕릉
평양특별시 력포구역 용산리에 있는 이 능은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릉으로 고구려가 427년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함께 옮겨 이 곳에 위치하게 되었다고 북한에서 주장하는 무덤이다. 현재의 모습은 1993년 대대적인 개건한 것이다. 무덤은 봉분의 돌기단, 안칸의 꺾음식천정, 연꽃무늬만으로 된 벽화 내용으로 미루어 4세기 말~5세기 초의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36호 동명왕릉
평양특별시 력포구역 용산리에 있는 이 능은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릉으로 고구려가 427년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함께 옮겨 이 곳에 위치하게 되었다고 북한에서 주장하는 무덤이다. 현재의 모습은 1993년 대대적인 개건한 것이다. 무덤은 봉분의 돌기단, 안칸의 꺾음식천정, 연꽃무늬만으로 된 벽화 내용으로 미루어 4세기 말~5세기 초의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36호 동명왕릉
평양특별시 력포구역 용산리에 있는 이 능은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릉으로 고구려가 427년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함께 옮겨 이 곳에 위치하게 되었다고 북한에서 주장하는 무덤이다. 현재의 모습은 1993년 대대적인 개건한 것이다. 무덤은 봉분의 돌기단, 안칸의 꺾음식천정, 연꽃무늬만으로 된 벽화 내용으로 미루어 4세기 말~5세기 초의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36호 동명왕릉
평양특별시 력포구역 용산리에 있는 이 능은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릉으로 고구려가 427년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함께 옮겨 이 곳에 위치하게 되었다고 북한에서 주장하는 무덤이다. 현재의 모습은 1993년 대대적인 개건한 것이다. 무덤은 봉분의 돌기단, 안칸의 꺾음식천정, 연꽃무늬만으로 된 벽화 내용으로 미루어 4세기 말~5세기 초의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37호 황룡산성
남포특별시 룡강군 옥도리에 있다. 고구려 수도성인 평양성의 서쪽 위성이다. 성은 오석산(566m)을 주봉우리로 8개의 봉우리와 능선을 연결한 것으로 둘레는 6,620m이다.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에 보면, 5세기 초․중엽, 광개토대왕대에 남쪽에 7성, 동쪽에 6성을 축성하였다. 그 후 장수왕대의 평양천도에 따라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남포의 동진성, 황룡산성, 청룡산성, 서흥의 대현산성, 평산의 태백산성, 봉산의 휴류산성, 태봉산성 등 십 수 성이 축조되어 위성 방어망을 구축하였다. 그 후 1675년, 숙종은 국방을 강화하기 위하여 북쪽의 대흥산성과 황룡산성을 다시 쌓았다. 성문은 4개가 있는데 그 중 남문, 북문, 서문에는 각 각 문 밖에 옹성을 쌓아 수비에 유리하도록 하였다. 동문은 미식문인데 옹성이 없다. 성의 동, 서, 남, 북 4개의 봉우리들에는 장대터가 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39호 쌍기둥무덤
남포특별시 룡강군 용강읍에 있다. 쌍영총은 용강읍 북쪽 구릉 위에 자리잡은 고구려 시대의 벽화고분이다. 쌍영총은 안길과 묘실내부 석벽에 백회를 바르고, 그 위에 생활풍습 및 사신을 주제로한 그림을 그려 넣은 벽화고분이다. 용강대총과 함께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40호 보현사
보현사는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묘향산에 소재하고 있는 유서 깊은 사찰이다. 보현사의 진입방식은 다른 산지사찰과 같이 남북 종축선상에 놓여진 조계문, 해탈문, 천왕문 등의 산문을 차례로 지나가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크게 3개의 영역으로 구성되었던 보현사는 한국전쟁 시 건물들이 소멸되어 오늘날과 같이 축소된 모습으로 변화하였다. 즉 대웅전 전면의 수월당과 심검당은 찾아 볼 수 없으며 관음전과 영산전 사이에 있던 대장전도 사라졌다. 20세기 초에 존재하였으나 현재는 사라진 건물들은 진상전, 명월당, 대장전, 극락전, 명부전, 응향각, 조사전 등이다. 대웅전과 만세루는 최근에 다시 원래의 위치에 복원되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40호 보현사
보현사는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묘향산에 소재하고 있는 유서 깊은 사찰이다. 보현사의 진입방식은 다른 산지사찰과 같이 남북 종축선상에 놓여진 조계문, 해탈문, 천왕문 등의 산문을 차례로 지나가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크게 3개의 영역으로 구성되었던 보현사는 한국전쟁 시 건물들이 소멸되어 오늘날과 같이 축소된 모습으로 변화하였다. 즉 대웅전 전면의 수월당과 심검당은 찾아 볼 수 없으며 관음전과 영산전 사이에 있던 대장전도 사라졌다. 20세기 초에 존재하였으나 현재는 사라진 건물들은 진상전, 명월당, 대장전, 극락전, 명부전, 응향각, 조사전 등이다. 대웅전과 만세루는 최근에 다시 원래의 위치에 복원되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40호 보현사
보현사는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묘향산에 소재하고 있는 유서 깊은 사찰이다. 보현사의 진입방식은 다른 산지사찰과 같이 남북 종축선상에 놓여진 조계문, 해탈문, 천왕문 등의 산문을 차례로 지나가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크게 3개의 영역으로 구성되었던 보현사는 한국전쟁 시 건물들이 소멸되어 오늘날과 같이 축소된 모습으로 변화하였다. 즉 대웅전 전면의 수월당과 심검당은 찾아 볼 수 없으며 관음전과 영산전 사이에 있던 대장전도 사라졌다. 20세기 초에 존재하였으나 현재는 사라진 건물들은 진상전, 명월당, 대장전, 극락전, 명부전, 응향각, 조사전 등이다. 대웅전과 만세루는 최근에 다시 원래의 위치에 복원되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40호 보현사
보현사는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묘향산에 소재하고 있는 유서 깊은 사찰이다. 보현사의 진입방식은 다른 산지사찰과 같이 남북 종축선상에 놓여진 조계문, 해탈문, 천왕문 등의 산문을 차례로 지나가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크게 3개의 영역으로 구성되었던 보현사는 한국전쟁 시 건물들이 소멸되어 오늘날과 같이 축소된 모습으로 변화하였다. 즉 대웅전 전면의 수월당과 심검당은 찾아 볼 수 없으며 관음전과 영산전 사이에 있던 대장전도 사라졌다. 20세기 초에 존재하였으나 현재는 사라진 건물들은 진상전, 명월당, 대장전, 극락전, 명부전, 응향각, 조사전 등이다. 대웅전과 만세루는 최근에 다시 원래의 위치에 복원되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40호 보현사
보현사는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묘향산에 소재하고 있는 유서 깊은 사찰이다. 보현사의 진입방식은 다른 산지사찰과 같이 남북 종축선상에 놓여진 조계문, 해탈문, 천왕문 등의 산문을 차례로 지나가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크게 3개의 영역으로 구성되었던 보현사는 한국전쟁 시 건물들이 소멸되어 오늘날과 같이 축소된 모습으로 변화하였다. 즉 대웅전 전면의 수월당과 심검당은 찾아 볼 수 없으며 관음전과 영산전 사이에 있던 대장전도 사라졌다. 20세기 초에 존재하였으나 현재는 사라진 건물들은 진상전, 명월당, 대장전, 극락전, 명부전, 응향각, 조사전 등이다. 대웅전과 만세루는 최근에 다시 원래의 위치에 복원되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41호 보현사상원암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에 있는 상원암은 법왕봉 남쪽 산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 상원암은 법왕봉 아래 용소 근처에 있던 것을 고려말 현재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고 한다. 상원암은 본전과 칠성각, 산신각, 불유각, 용후각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1580년에 중창되었고, 1794년 상원암을 크게 보수되었다. 본전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본체에 동쪽에 1칸, 서쪽에 3칸을 덧붙였다. 본전의 구조형식은 5량구조의 다포계 팔작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41호 보현사상원암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에 있는 상원암은 법왕봉 남쪽 산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 상원암은 법왕봉 아래 용소 근처에 있던 것을 고려말 현재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고 한다. 상원암은 본전과 칠성각, 산신각, 불유각, 용후각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1580년에 중창되었고, 1794년 상원암을 크게 보수되었다. 본전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본체에 동쪽에 1칸, 서쪽에 3칸을 덧붙였다. 본전의 구조형식은 5량구조의 다포계 팔작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41호 보현사상원암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에 있는 상원암은 법왕봉 남쪽 산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 상원암은 법왕봉 아래 용소 근처에 있던 것을 고려말 현재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고 한다. 상원암은 본전과 칠성각, 산신각, 불유각, 용후각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1580년에 중창되었고, 1794년 상원암을 크게 보수되었다. 본전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본체에 동쪽에 1칸, 서쪽에 3칸을 덧붙였다. 본전의 구조형식은 5량구조의 다포계 팔작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41호 보현사상원암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에 있는 상원암은 법왕봉 남쪽 산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 상원암은 법왕봉 아래 용소 근처에 있던 것을 고려말 현재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고 한다. 상원암은 본전과 칠성각, 산신각, 불유각, 용후각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1580년에 중창되었고, 1794년 상원암을 크게 보수되었다. 본전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본체에 동쪽에 1칸, 서쪽에 3칸을 덧붙였다. 본전의 구조형식은 5량구조의 다포계 팔작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41호 보현사상원암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에 있는 상원암은 법왕봉 남쪽 산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 상원암은 법왕봉 아래 용소 근처에 있던 것을 고려말 현재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고 한다. 상원암은 본전과 칠성각, 산신각, 불유각, 용후각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1580년에 중창되었고, 1794년 상원암을 크게 보수되었다. 본전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본체에 동쪽에 1칸, 서쪽에 3칸을 덧붙였다. 본전의 구조형식은 5량구조의 다포계 팔작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42호 보현사축성전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에 있는 축성전은 상원암 동쪽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다. <축성전현판기>에 의하면 축성전은 왕세자를 낳은 명성황후가 1875년 그의 장수를 빌기 위하여 금강산과 묘향산 등 여러 명산에 절간을 짓고 부처님께 축원하기 위해 지은 불전들 중의 하나로 공사에 착공한 뒤 10개월 만에 완공한 것이다. 이 건물에는 축원을 위해 왕궁에서 파견된 관리, 궁녀, 무당들이 주로 거처하였으므로 불전보다는 살림집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본체에 양 옆에 한 칸씩 날개채를 달아낸 ꡐᄃꡑ자형 평면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42호 보현사축성전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에 있는 축성전은 상원암 동쪽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다. <축성전현판기>에 의하면 축성전은 왕세자를 낳은 명성황후가 1875년 그의 장수를 빌기 위하여 금강산과 묘향산 등 여러 명산에 절간을 짓고 부처님께 축원하기 위해 지은 불전들 중의 하나로 공사에 착공한 뒤 10개월 만에 완공한 것이다. 이 건물에는 축원을 위해 왕궁에서 파견된 관리, 궁녀, 무당들이 주로 거처하였으므로 불전보다는 살림집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본체에 양 옆에 한 칸씩 날개채를 달아낸 ꡐᄃꡑ자형 평면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42호 보현사축성전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에 있는 축성전은 상원암 동쪽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다. <축성전현판기>에 의하면 축성전은 왕세자를 낳은 명성황후가 1875년 그의 장수를 빌기 위하여 금강산과 묘향산 등 여러 명산에 절간을 짓고 부처님께 축원하기 위해 지은 불전들 중의 하나로 공사에 착공한 뒤 10개월 만에 완공한 것이다. 이 건물에는 축원을 위해 왕궁에서 파견된 관리, 궁녀, 무당들이 주로 거처하였으므로 불전보다는 살림집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본체에 양 옆에 한 칸씩 날개채를 달아낸 ꡐᄃꡑ자형 평면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43호 보현사불영대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에 있는 불영대는 상원암에서 동쪽으로 3Km 떨어진 불영봉에 있는 묘향산 보현사의 암자이다. 1570년에 창건하였으나 이후 1669년 화재로 소실되어 이듬해인 1700년에 다시 지었다.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전면에는 보현사 및 그 소속 암자들과 같이 툇마루를 두면서 기둥 하나를 생략하여 마치 4칸처럼 보이도록 하였다. 불영대는 임진왜란 시 전주사고의 《조선왕조실록》을 옮겨 보관하고 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43호 보현사불영대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에 있는 불영대는 상원암에서 동쪽으로 3Km 떨어진 불영봉에 있는 묘향산 보현사의 암자이다. 1570년에 창건하였으나 이후 1669년 화재로 소실되어 이듬해인 1700년에 다시 지었다.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전면에는 보현사 및 그 소속 암자들과 같이 툇마루를 두면서 기둥 하나를 생략하여 마치 4칸처럼 보이도록 하였다. 불영대는 임진왜란 시 전주사고의 《조선왕조실록》을 옮겨 보관하고 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44호 구주읍성남문
구성읍은 고구려 시기의 만년군으로, 고려 초 거란과의 강화로 얻어낸 압록강 동쪽의 강동6주의 하나로, 이곳에 성을 쌓고 구주라 하였다. 진남루라는 편액을 가지고 있는 남문은 1836년(현종 2)에 중건한 것으로 한국전쟁 중 소실된 것을 1979년 원형대로 복원한 것이다. 이 성문은 구성읍성의 네 대문 가운데서 제일 크고 중요한 성문이었다. 석축위에 세운 문루는 중층으로 정면 3칸(10.7m) 측면3칸(10m)의 평면에 다포식 공포이고 하층은 우진각지붕형태, 상층은 팔작지붕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45호 창성향교
평북 창성군 창성읍에 있다. 창성읍의 내천에서 북동쪽으로 약 300m 지점의 산중턱에 있으며, 조선 초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건물은 1765년(영조 41)에 다시 지은 것이다. 명륜당은 단층 기단에 둥근 장대석 주춧돌을 놓고 정면 5칸(15.4m), 측면 2칸(5.6m)으로 세운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대성전은 거칠게 다듬은 자연석으로 쌓은 높직한 기단에 자연석 주춧돌을 놓고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세운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동재는 정면 5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북쪽 2칸은 전면에 툇마루가 있는 온돌방이며, 나머지 3칸은 통칸 온돌방이다. 동무와 서무는 각각 정면 2칸, 측면1칸의 맞배지붕집으로, 지붕의 합각면에는 방풍판을 설치했다. 내삼문은 주춧돌만 남아 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46호 천주사
평안북도 영변군 영변읍에 있는 조선시대의 사찰이다. 영변읍 약산 동대(東臺)의 동쪽 기슭에 있는 사찰로, 지은 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1684년(조선 숙종 10), 이 절에서 동북쪽으로 약 30m 지점에 있는 영변 철옹성을 수리하면서 쇄락해 있던 천주사도 함께 중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사찰의 규모는 80여 칸 정도였으나 현재 경내에는 보광전, 천주루(天柱樓), 망월대(望月臺), 향일헌(向日軒), 요사채가 남아 있다. 보광전은 천주사의 주불전으로 1722년에 지었다. 사각형으로 다듬은 돌로 쌓은 축대 위 두 단의 장대석 기단에 정면 3칸(10.3m), 측면 2칸(7m)으로 세운 다포계 팔작지붕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46호 천주사
평안북도 영변군 영변읍에 있는 조선시대의 사찰이다. 영변읍 약산 동대(東臺)의 동쪽 기슭에 있는 사찰로, 지은 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1684년(조선 숙종 10), 이 절에서 동북쪽으로 약 30m 지점에 있는 영변 철옹성을 수리하면서 쇄락해 있던 천주사도 함께 중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사찰의 규모는 80여 칸 정도였으나 현재 경내에는 보광전, 천주루(天柱樓), 망월대(望月臺), 향일헌(向日軒), 요사채가 남아 있다. 보광전은 천주사의 주불전으로 1722년에 지었다. 사각형으로 다듬은 돌로 쌓은 축대 위 두 단의 장대석 기단에 정면 3칸(10.3m), 측면 2칸(7m)으로 세운 다포계 팔작지붕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46호 천주사
평안북도 영변군 영변읍에 있는 조선시대의 사찰이다. 영변읍 약산 동대(東臺)의 동쪽 기슭에 있는 사찰로, 지은 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1684년(조선 숙종 10), 이 절에서 동북쪽으로 약 30m 지점에 있는 영변 철옹성을 수리하면서 쇄락해 있던 천주사도 함께 중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사찰의 규모는 80여 칸 정도였으나 현재 경내에는 보광전, 천주루(天柱樓), 망월대(望月臺), 향일헌(向日軒), 요사채가 남아 있다. 보광전은 천주사의 주불전으로 1722년에 지었다. 사각형으로 다듬은 돌로 쌓은 축대 위 두 단의 장대석 기단에 정면 3칸(10.3m), 측면 2칸(7m)으로 세운 다포계 팔작지붕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46호 천주사
평안북도 영변군 영변읍에 있는 조선시대의 사찰이다. 영변읍 약산 동대(東臺)의 동쪽 기슭에 있는 사찰로, 지은 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1684년(조선 숙종 10), 이 절에서 동북쪽으로 약 30m 지점에 있는 영변 철옹성을 수리하면서 쇄락해 있던 천주사도 함께 중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사찰의 규모는 80여 칸 정도였으나 현재 경내에는 보광전, 천주루(天柱樓), 망월대(望月臺), 향일헌(向日軒), 요사채가 남아 있다. 보광전은 천주사의 주불전으로 1722년에 지었다. 사각형으로 다듬은 돌로 쌓은 축대 위 두 단의 장대석 기단에 정면 3칸(10.3m), 측면 2칸(7m)으로 세운 다포계 팔작지붕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48호 고려장성
북방 유목민족인 거란, 여진족 등의 침입을 막기 위해 고려시대에 한반도의 북방에 쌓은 성이다. 압록강 어구에서부터 평안북도의 북쪽과 자강도의 희천 지방, 그리고 평안남도의 북단을 가로질러 함경도의 동해바다에 이르는 천여 리를 쌓은 석성으로, 흔히 천리장성이라 불린다. 그 길이는 약 1,000여 리(400km 가량)에 이른다. 1044(고려 정종 10)년에 완성되었다. 성벽의 높이는 4~7m 정도로,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성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48호 고려장성
북방 유목민족인 거란, 여진족 등의 침입을 막기 위해 고려시대에 한반도의 북방에 쌓은 성이다. 압록강 어구에서부터 평안북도의 북쪽과 자강도의 희천 지방, 그리고 평안남도의 북단을 가로질러 함경도의 동해바다에 이르는 천여 리를 쌓은 석성으로, 흔히 천리장성이라 불린다. 그 길이는 약 1,000여 리(400km 가량)에 이른다. 1044(고려 정종 10)년에 완성되었다. 성벽의 높이는 4~7m 정도로,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성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48호 고려장성
북방 유목민족인 거란, 여진족 등의 침입을 막기 위해 고려시대에 한반도의 북방에 쌓은 성이다. 압록강 어구에서부터 평안북도의 북쪽과 자강도의 희천 지방, 그리고 평안남도의 북단을 가로질러 함경도의 동해바다에 이르는 천여 리를 쌓은 석성으로, 흔히 천리장성이라 불린다. 그 길이는 약 1,000여 리(400km 가량)에 이른다. 1044(고려 정종 10)년에 완성되었다. 성벽의 높이는 4~7m 정도로,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성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49호 철옹성남문
평안북도 영변군 영변읍에 있다. 철옹성은 고구려시대에 처음 쌓은 것으로 보여진다. 현재의 성은 조선 초기인 1416년(태종 16) 에 쌓은 것을, 이후 1683년(숙종 9) 본성 안의 서남부분을 막아 산성을 쌓고, 1684년(숙종 10)에는 본성 안의 서북부분을 막아 북성을 쌓았다고 한다. 철옹성의 남문은 철옹성의 정문으로 1658년(효종 9)에 화재로 소실된 것은 다음해 단층으로 중건했으며 1789년(정조 13)에 중층으로 재건하였다. 1824년(순조 24)에 홍예문을 보수한 일이 있으며 이후 현재의 자리로 이축되었다. 석축 위의 문루는 정면3칸(12.67m) 측면3칸(8.3m)의 중층 팔작집으로, 다포식 공포를 사용했다. 상하층에는 각각 “고연주성문”과 “만노문” 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50호 서운사
서운사는 평안북도 영변군 영변읍에서 약산 동대를 지난 제일봉의 서쪽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서운사란 명칭은 항상 구름이 끼어 있어 사람이 구름 속에 산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명칭이다. 고려 말기인 1345년에 창건하였다고 기록이 있다. 창건 당시에는 대웅전과 선승당이 있었다고 한다. 1675년에는 승려 수계, 천십, 벽취 등이 개건하였는데, 당시 건물명으로는 백화전, 응진전, 청운당 등이 언급되어 있으며 대웅전에는 미륵보살상을 봉안하였다. 1683년에는 섭청루를 건립하였고, 1708년에는 승려 석훈이 향로전을 중수하였는데 그 규모가 묘향산 보현사와 같았다고 한다. 이후 1654년, 1678년, 1756년에 중창을 하였으나, 현재는 대웅전과 청운당 만이 남아 있다. 대웅전은 장대석으로 축조한 기단 위에 건립한 정면3칸(7.61m) 측면2칸(5.01m) 건물이다. 청운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집으로 초익공을 사용한 소박한 건물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50호 서운사
서운사는 평안북도 영변군 영변읍에서 약산 동대를 지난 제일봉의 서쪽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서운사란 명칭은 항상 구름이 끼어 있어 사람이 구름 속에 산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명칭이다. 고려 말기인 1345년에 창건하였다고 기록이 있다. 창건 당시에는 대웅전과 선승당이 있었다고 한다. 1675년에는 승려 수계, 천십, 벽취 등이 개건하였는데, 당시 건물명으로는 백화전, 응진전, 청운당 등이 언급되어 있으며 대웅전에는 미륵보살상을 봉안하였다. 1683년에는 섭청루를 건립하였고, 1708년에는 승려 석훈이 향로전을 중수하였는데 그 규모가 묘향산 보현사와 같았다고 한다. 이후 1654년, 1678년, 1756년에 중창을 하였으나, 현재는 대웅전과 청운당 만이 남아 있다. 대웅전은 장대석으로 축조한 기단 위에 건립한 정면3칸(7.61m) 측면2칸(5.01m) 건물이다. 청운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집으로 초익공을 사용한 소박한 건물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51호 통군정
평안북도 의주군에 있는 통군정은 의주성의 북쪽 장대로 세워진 누정이다. 통군정이 언제 처음 세워졌는지 알 수 있는 명확한 기록은 없으나, 고려 990년(성종 9)에 편찬된 《임사홍기》에 통군정에 관련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 이미 지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의 통군정은 1478년에 개건한 것이다. 통군정은 그 후 1538년을 비롯하여 여러 차례 보수도 하여 왔지만 15세기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통군정은 정면 4칸(14.41m) 측면 4칸(11.85m)의 단층 팔작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52호 의주읍성
의주일대는 압록강을 끼고 있어 고구려 때부터 요새로 중요시되었으며, 그 때 이미 성을 쌓았다. 고구려 때 쌓은 성은 발해를 거쳐 고려 때에도 북방방위의 중진으로 이용되었다. 15세기 중엽에 의주에는 진이 설치되었으며, 1520년에 대대적인 개축 확장 공사가 진행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이때 개축된 성의 둘레는 27,531자로, 종전 성 둘레의 거의 2배로, 동, 서, 남, 북에 옹성이 있는 성문들이 설치되었고, 성안에는 1개의 못과 43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이 무렵 치들과 포루, 장대 등도 세워졌다. 현재 의주읍성에는 성벽의 일부가 남아 있다. 의주읍성은 도시 건설 등의 이유로 일제강점기에 상당부분 훼손되었다. 의주읍성 남문은 의주 읍성에 있는 4개의 성문 가운데 하나로 ꡐ장변루ꡑ 혹은 ꡐ내훈루ꡑ라 하였고, 또 ꡐ해동제일관ꡑ 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 읍성의 정문 기능을 하였다. 의주 남문은 1613년(광해군 5)에 초창되었고 1744년(영조 20)에 중수되었으며, 1769년(영조 43)에 개건하였고 1849년(헌종 15)에 중수되었으나 한국전쟁 중 소실되었던 것을 복원한 것이 지금의 모습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53호 금광사
금광사는 평안북도 의주군 송장면 금광리 석숭산에 위치하고 있다. 석숭산은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져서 그 경관이 매우 뛰어나 ꡐ의주의 금강ꡑ이라고 하여 일명 금강산으로 부르기도 한다. 따라서 금광사는 금강사라고도 불리 운다. 금광사의 창건연대에 대하여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1418년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1726년에 승려 묘안이 중건하였고, 1846년에 백화전을, 1849년에 대웅보전, 1851년에 만세루를 중건하였다고 한다. 금광사에는 과거 대웅보전 등 열한채의 전각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에는 대웅보전, 만세루, 백화전, 청운당(영빈당), 추원당, 영당, 칠성각 등 7동만 남아 있다. 대웅보전은 정면3칸(9.25m) 측면2칸(6m)규모의 5량 구조로 다포계 팔작집이다. 백화전은 정면 6칸, 측면 4칸의 요사채 건물이다. 청운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 건물로 중정을 바라보는 전면에 한 칸의 툇마루를 놓아 살림집과 같은 모습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53호 금광사
금광사는 평안북도 의주군 송장면 금광리 석숭산에 위치하고 있다. 석숭산은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져서 그 경관이 매우 뛰어나 ꡐ의주의 금강ꡑ이라고 하여 일명 금강산으로 부르기도 한다. 따라서 금광사는 금강사라고도 불리 운다. 금광사의 창건연대에 대하여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1418년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1726년에 승려 묘안이 중건하였고, 1846년에 백화전을, 1849년에 대웅보전, 1851년에 만세루를 중건하였다고 한다. 금광사에는 과거 대웅보전 등 열한채의 전각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에는 대웅보전, 만세루, 백화전, 청운당(영빈당), 추원당, 영당, 칠성각 등 7동만 남아 있다. 대웅보전은 정면3칸(9.25m) 측면2칸(6m)규모의 5량 구조로 다포계 팔작집이다. 백화전은 정면 6칸, 측면 4칸의 요사채 건물이다. 청운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 건물로 중정을 바라보는 전면에 한 칸의 툇마루를 놓아 살림집과 같은 모습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53호 금광사
금광사는 평안북도 의주군 송장면 금광리 석숭산에 위치하고 있다. 석숭산은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져서 그 경관이 매우 뛰어나 ꡐ의주의 금강ꡑ이라고 하여 일명 금강산으로 부르기도 한다. 따라서 금광사는 금강사라고도 불리 운다. 금광사의 창건연대에 대하여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1418년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1726년에 승려 묘안이 중건하였고, 1846년에 백화전을, 1849년에 대웅보전, 1851년에 만세루를 중건하였다고 한다. 금광사에는 과거 대웅보전 등 열한채의 전각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에는 대웅보전, 만세루, 백화전, 청운당(영빈당), 추원당, 영당, 칠성각 등 7동만 남아 있다. 대웅보전은 정면3칸(9.25m) 측면2칸(6m)규모의 5량 구조로 다포계 팔작집이다. 백화전은 정면 6칸, 측면 4칸의 요사채 건물이다. 청운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 건물로 중정을 바라보는 전면에 한 칸의 툇마루를 놓아 살림집과 같은 모습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54호 박천심원사보광전
박천 심원사는 평안남도 성천군 박천읍에서 동쪽으로 5km 떨어진 봉린산에 위치하고 있다. 심원사의 창건은 현욱국사(786~868)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하므로 9세기 초로 생각된다. 현재 경내에는 보광전, 전등루, 향로각 등의 건물이 남아있다. 심원사 보광전은 정면3칸(10.85m) 측면 2칸(7.2m) 규모이고, 5량 구조의 다포계 팔작집이다. 1718년 보광전을 고칠 때 용마루에서 발견한 묵서명에 1316년 다시 세웠다는 기록으로 보아 고려 말의 건물양식으로 보인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54호 박천심원사보광전
박천 심원사는 평안남도 성천군 박천읍에서 동쪽으로 5km 떨어진 봉린산에 위치하고 있다. 심원사의 창건은 현욱국사(786~868)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하므로 9세기 초로 생각된다. 현재 경내에는 보광전, 전등루, 향로각 등의 건물이 남아있다. 심원사 보광전은 정면3칸(10.85m) 측면 2칸(7.2m) 규모이고, 5량 구조의 다포계 팔작집이다. 1718년 보광전을 고칠 때 용마루에서 발견한 묵서명에 1316년 다시 세웠다는 기록으로 보아 고려 말의 건물양식으로 보인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54호 박천심원사보광전
박천 심원사는 평안남도 성천군 박천읍에서 동쪽으로 5km 떨어진 봉린산에 위치하고 있다. 심원사의 창건은 현욱국사(786~868)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하므로 9세기 초로 생각된다. 현재 경내에는 보광전, 전등루, 향로각 등의 건물이 남아있다. 심원사 보광전은 정면3칸(10.85m) 측면 2칸(7.2m) 규모이고, 5량 구조의 다포계 팔작집이다. 1718년 보광전을 고칠 때 용마루에서 발견한 묵서명에 1316년 다시 세웠다는 기록으로 보아 고려 말의 건물양식으로 보인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54호 박천심원사보광전
박천 심원사는 평안남도 성천군 박천읍에서 동쪽으로 5km 떨어진 봉린산에 위치하고 있다. 심원사의 창건은 현욱국사(786~868)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하므로 9세기 초로 생각된다. 현재 경내에는 보광전, 전등루, 향로각 등의 건물이 남아있다. 심원사 보광전은 정면3칸(10.85m) 측면 2칸(7.2m) 규모이고, 5량 구조의 다포계 팔작집이다. 1718년 보광전을 고칠 때 용마루에서 발견한 묵서명에 1316년 다시 세웠다는 기록으로 보아 고려 말의 건물양식으로 보인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54호 박천심원사보광전
박천 심원사는 평안남도 성천군 박천읍에서 동쪽으로 5km 떨어진 봉린산에 위치하고 있다. 심원사의 창건은 현욱국사(786~868)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하므로 9세기 초로 생각된다. 현재 경내에는 보광전, 전등루, 향로각 등의 건물이 남아있다. 심원사 보광전은 정면3칸(10.85m) 측면 2칸(7.2m) 규모이고, 5량 구조의 다포계 팔작집이다. 1718년 보광전을 고칠 때 용마루에서 발견한 묵서명에 1316년 다시 세웠다는 기록으로 보아 고려 말의 건물양식으로 보인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55호 양화사
양화사는 평안북도 태천면 상단리에 있는 사찰로 현재 절 내에는 대웅전 등 14채의 건물이 남아 있다. 원래 양화사의 주불전은 보광전이었으나, 992년과 1461년 다시 지으면서 대웅전으로 이름을 고쳤다. 지금의 대웅전은 1874년 불에 탄 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대웅전은 양화사의 주불전으로 정면3칸(11.8m) 측면2칸(6.6m)의 건물로 익공계 팔작집이다. 대웅전은 조선 후기의 장식성이 두드러진 건물로 1874년 불타버린 후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55호 양화사
양화사는 평안북도 태천면 상단리에 있는 사찰로 현재 절 내에는 대웅전 등 14채의 건물이 남아 있다. 원래 양화사의 주불전은 보광전이었으나, 992년과 1461년 다시 지으면서 대웅전으로 이름을 고쳤다. 지금의 대웅전은 1874년 불에 탄 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대웅전은 양화사의 주불전으로 정면3칸(11.8m) 측면2칸(6.6m)의 건물로 익공계 팔작집이다. 대웅전은 조선 후기의 장식성이 두드러진 건물로 1874년 불타버린 후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55호 양화사
양화사는 평안북도 태천면 상단리에 있는 사찰로 현재 절 내에는 대웅전 등 14채의 건물이 남아 있다. 원래 양화사의 주불전은 보광전이었으나, 992년과 1461년 다시 지으면서 대웅전으로 이름을 고쳤다. 지금의 대웅전은 1874년 불에 탄 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대웅전은 양화사의 주불전으로 정면3칸(11.8m) 측면2칸(6.6m)의 건물로 익공계 팔작집이다. 대웅전은 조선 후기의 장식성이 두드러진 건물로 1874년 불타버린 후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56호 룡오리산성
평안북도 태천군 용산리 산성산에 있는 고구려의 옛 성이다. 성의 둘레는 2,020m이다. 현재 성벽은 4~6m정도의 높이로 남아있다. 성문은 동서남북의 네 면에 설치하였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57호 보현사관음전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에 있는 전각으로 보현사에서 가장 오랜 건물의 하나이다. 관음전은 정면 9칸(32m) 측면 5칸(15.5m)으로 되어 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57호 보현사관음전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에 있는 전각으로 보현사에서 가장 오랜 건물의 하나이다. 관음전은 정면 9칸(32m) 측면 5칸(15.5m)으로 되어 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57호 보현사관음전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에 있는 전각으로 보현사에서 가장 오랜 건물의 하나이다. 관음전은 정면 9칸(32m) 측면 5칸(15.5m)으로 되어 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58호 백마산성
평안북도 피현군 백마노동자구 백마산 고지에 위치한 고구려 시대의 산성이다. 백마산성은 고구려 시기 험준한 산세를 이용하여 처음으로 축조된 이래 여러 차례 개축 또는 증축, 보수되면서 고려, 조선에 이르는 오랜 기간에 걸쳐 군사요새로 이용되었다. 백마산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려시대 1014년부터 1017년에 걸쳐 축성된 내성은 작은 규모로 개축되었으며, 그 둘레는 약 2.6km에 이른다. 외성은 조선시대 1735년에 내성 밖 남쪽에 덧대어 방형으로 쌓았다. 외성을 이루는 성벽의 길이는 약 2.4km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58호 백마산성
평안북도 피현군 백마노동자구 백마산 고지에 위치한 고구려 시대의 산성이다. 백마산성은 고구려 시기 험준한 산세를 이용하여 처음으로 축조된 이래 여러 차례 개축 또는 증축, 보수되면서 고려, 조선에 이르는 오랜 기간에 걸쳐 군사요새로 이용되었다. 백마산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려시대 1014년부터 1017년에 걸쳐 축성된 내성은 작은 규모로 개축되었으며, 그 둘레는 약 2.6km에 이른다. 외성은 조선시대 1735년에 내성 밖 남쪽에 덧대어 방형으로 쌓았다. 외성을 이루는 성벽의 길이는 약 2.4km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58호 백마산성
평안북도 피현군 백마노동자구 백마산 고지에 위치한 고구려 시대의 산성이다. 백마산성은 고구려 시기 험준한 산세를 이용하여 처음으로 축조된 이래 여러 차례 개축 또는 증축, 보수되면서 고려, 조선에 이르는 오랜 기간에 걸쳐 군사요새로 이용되었다. 백마산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려시대 1014년부터 1017년에 걸쳐 축성된 내성은 작은 규모로 개축되었으며, 그 둘레는 약 2.6km에 이른다. 외성은 조선시대 1735년에 내성 밖 남쪽에 덧대어 방형으로 쌓았다. 외성을 이루는 성벽의 길이는 약 2.4km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59호 성동리다라니석당
성동리다라니석당은 1027년경 평안북도 피현군 성동리에 세워진 고려시대 불정사라는 옛 절터에 있었던 석조물로서 현재는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묘향산 보현사에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높이 6.23m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59호 성동리다라니석당
성동리다라니석당은 1027년경 평안북도 피현군 성동리에 세워진 고려시대 불정사라는 옛 절터에 있었던 석조물로서 현재는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묘향산 보현사에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높이 6.23m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59호 성동리다라니석당
성동리다라니석당은 1027년경 평안북도 피현군 성동리에 세워진 고려시대 불정사라는 옛 절터에 있었던 석조물로서 현재는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묘향산 보현사에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높이 6.23m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60호 구주성
구주성은 평안북도 구성시 구성읍 북쪽 이구산의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쌓은 석성이다. 10세기 후반기부터 13세기까지 구주라고 불린 구성은 고려 서북지방의 요충지였으며, 1231년에는 정원대도호부로 승격되었다. 구주성이란 명칭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이구산의 산줄기들이 가로, 세로로 뻗어 마치 거북등무늬처럼 생겼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성은 994년에 축조되었으며, 압록강에서 청천강에 이르는 중요한 길목을 지켰던 성이다. 구주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이루어 졌는데, 내성은 둘레가 5km이고, 나중에 쌓은 외성은 1.5km에 달하며, 높이는 5m 정도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61호 릉한산성
평안북도 곽산군 곽산읍에서 동북쪽으로 약 3km 떨어진 능한산에 있눈 석성이다. 고구려시기에 처음 세워졌으며,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여러 번 고치면서 사용되었다. 산성은 4각추형태의 다듬은 돌로 벽돌을 쌓듯이 구축한 포곡식 석성으로 둘레가 2.8km에 이른다. 산성의 높이는 5~6m, 하단부의 너비는 6m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62호 룡골산성
평안북도 피현군과 염주군의 경계에 있는 용골산(476m) 마루에 축성된 옛 산성으로 내성과 외성으로 구분되어 있다. 내성은 고구려시대에 축성한 것으로 그 둘레가 약 670m이며, 외성은 조선시대인 1692년에 내성 남쪽에 덧대어 쌓은 것으로 둘레가 약 2.5km이다. 내성은 1704년 크게 고쳐 쌓았으나 성벽기초에 부분적으로 고구려시기의 모습이 남아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63호 녕변철옹성
평안북도 영변군 영변읍에 있는 철옹성은 고구려시대에 처음 쌓은 것으로 보여 진다. 영변읍을 돌아 쌓은 본성과 본성 안의 서쪽부분을 구획한 약산성은 고구려 때의 성이고, 그 밖의 부분성들인 북성과 신성은 그 이후에 쌓은 성인데 이 성들을 포괄하여 일반적으로 철옹성이라고 부른다. 성의 영역은 본성, 약산성, 신성, 북성 등 4개의 부분성으로 이루어졌다. 현재의 성은 조선 초기인 1416년(태종 16)에 3만 6백명의 인원을 동원하여 27일간 공사를 하여 쌓은 것을, 이후 1683(숙종 9) 본성 안의 서남부분을 막아 신성을 쌓고, 1684년(숙종 10)에는 본성 안의 서북부분을 막아 북성을 쌓았다고 한다. 약산성은 1725(영조 원년)년과 1976년에 개축하였다. 철옹성의 둘레는 본성이 14km이고, 약산성이 1km, 신성이 3km, 그리고 북성이 2km이며, 남은 성벽의 높이는 6~7m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64호 인풍루
인풍루는 자강도 강계시 충성동에 위치한 강계읍성의 서북 장대로 군사들의 교련과 사열에 많이 쓰인 군사시설이었다. 강계읍성은 15세기 압록강 연안 서북방면의 방어를 위하여 처음 지어지고 이후 수차례의 보수를 거쳐 1739년(영조 15)의 대규모 중축공사로 현재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강계읍성에는 4곳의 성문과 장대, 누정, 3개의 못과 12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인풍루와 망미정, 북문과 거연정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인풍루는 1472년(성종 3) 처음 건설되었고, 1680년(숙종 6)에 개건되었다. 건물의 규모는 5칸(18.75m) 측면 3칸(8.9m) 단층의 팔작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65호 망미정
망미정은 자강도 강계시 부창동에 위치한 강계읍성의 남장대이다. 강계읍성은 15세기 압록강 연안 서북방면의 방어를 위하여 처음 지은 이후 수차례의 보수를 거쳐 1739년(영조 15)의 대규모 중축공사로 현재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망미정은 강계읍성의 축성과 같이 1436년(세종 18)에 창건되어 1837(헌종 3)년에 개수되었다. 장대라고는 하나, 소형 정자로서 절벽의 높은 곳에 있어 성 내외를 바라보는 조망 좋은 곳에 있어 이름도 망미정(望美亭)이라 하였다. 절벽의 높은 바위 위에 높이 90cm의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세운 정면 3칸(7.16m) 측면 2칸(3.5m)의 홑처마 팔작지붕 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66호 강계아사
강계아사는 조선시대 강계부의 관아 건물로 자강도 강계시 북문동에 자리하고 있다. 원래는 여러 채의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동헌, 내헌, 육모정만 남아 있다. 동헌은 1663년(현종 4) 조선시대에 지어진 건물로서,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1888년(고종 25)에 재건하였다. 재건 당시 강계부의 관청건물로 현재까지 전해 내려온다. 동헌은 부사가 공무를 집행하던 강계아사의 중요 건물로 나지막한 석조기단 위에 세운 정면8칸(21.8m) 측면4칸(9.8m)의 큰 규모의 건물이다. 내헌은 부사가 생활하던 건물로 정면 6칸, 측면 2칸 규모이며 전면에는 좁은 퇴칸을 두었다. 육모정은 서북방을 방어하던 군사들이 활쏘기를 연습하던 곳으로 육각형 평면의 정자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66호 강계아사
강계아사는 조선시대 강계부의 관아 건물로 자강도 강계시 북문동에 자리하고 있다. 원래는 여러 채의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동헌, 내헌, 육모정만 남아 있다. 동헌은 1663년(현종 4) 조선시대에 지어진 건물로서,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1888년(고종 25)에 재건하였다. 재건 당시 강계부의 관청건물로 현재까지 전해 내려온다. 동헌은 부사가 공무를 집행하던 강계아사의 중요 건물로 나지막한 석조기단 위에 세운 정면8칸(21.8m) 측면4칸(9.8m)의 큰 규모의 건물이다. 내헌은 부사가 생활하던 건물로 정면 6칸, 측면 2칸 규모이며 전면에는 좁은 퇴칸을 두었다. 육모정은 서북방을 방어하던 군사들이 활쏘기를 연습하던 곳으로 육각형 평면의 정자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67호 안악3호무덤
황해남도 안악군 오국리에 있는 고구려시대의 벽화고분으로 1호분이 발견된 이후 2, 3호분이 추가로 발견되었다. 고분의 벽면에는 연대를 알 수 있는 명문이 있는데 ꡒ永和十三年十月戊子朔甘六日 使持節都督諸軍事 平東將軍護撫夷校尉樂浪 相昌黎玄帶方太守都 鄕侯幽州遼東平郭 都鄕敬上里冬壽字 安年六十九薨官ꡓ라 적혀 있다. 첫 구절의 ꡐ영화 13년ꡑ은 동진의 연호로 357년을 말하는 것이며, 동수는 336년(고구려 고국원왕 6) 요동에서 고구려로 망명한 동수를 말한다. 한동안 이 무덤의 피장자가 동수라는 설이 있어 동수묘라 부르기도 하였으나 이후에 고구려의 소수림왕 또는 고국원왕이라는 설이 등장했으며, 현재 북한에서는 고국원왕으로 추정하고 있다. 무덤무지(봉분)는 방대형으로 그 크기는 남북이 33m, 동서가 30m, 높이가 6m이다. 200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69호 해주석빙고
해주석빙고는 황해남도 해주시 옥계동에 있는 얼음 창고로 고려 초기에 처음 세워졌고, 1735년(영조 11)에 크게 보수하였다. 이 석빙고의 내부는 길이가 28.3m, 너비 4.5m, 높이 약 6m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70호 해주9층탑
해주 구층 석탑은 황해남도 해주시 해청동에 위치한 고려시대의 탑이다. 이 탑은 원래 5층탑이었으나, 다른 탑의 부재가 일부 섞여서 9층탑이 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정확한 것은 아니다. 지금은 8층 탑신까지 남아있다. 높이는 5.92m 정도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71호 해주5층탑
해주오층석탑은 황해남도 해주시 옥계동에 위치한 고려시대의 탑이다. 부근에 석빙고가 있어서 일명 해주석빙고5층석탑이라 불리기도 한다. 높이는 4.63m 가량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72호 순명문
순명문은 황해남도 해주시 영광동에 있는 해주읍성의 남문이다. 1391년(공양왕 3년) 해주읍성을 축성할 때 함께 세웠다. 순명문은 축대위에 2층의 문루로 이루어져 있는데, 일제강점기에 소실되어 현재는 문터만 남아있다. 순명문은 축대중앙에 홍예문을 두었으며, 높이는 약 4m, 너비는 약 9.5m의 규모이다. 순명문 앞에는 국보유적 68호인 부용당터가 남아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73호 안악1호무덤
황해남도 안악군 대추리 산지 마을 뒤 언덕에 고구려 벽화 무덤 2기가 있다. 안악 1호 및 2호 무덤인데 그 중 1호 무덤은 앞에 있는 것이다. 안악고분 가운데 최초로 발견된 것이 1호이며 이어서 2, 3호가 발견되었다. 이 무덤은 인물풍속도를 그린 외칸무덤(단실묘)이다. 무덤무지(봉분)는 방대형이며, 무덤칸은 안길(연도)과 안칸(현실)으로 이루어졌다. 무덤의 크기는 둘레가 약 50m이고, 높이는 남쪽 3.5m, 북쪽 2.5m, 동쪽은 능의 꼭대기에서 약 1m 내려와서 깎여졌으며 직경은 남북이 17m, 동서가 13m 가량이다. 안악 1호 무덤은 독특하고 풍부한 벽화를 통하여 고구려의 건축, 회화, 신앙 등 당시의 문화와 풍습을 생생하게 보여 주는 4세기 말 무덤이다. 현재 이 무덤은 200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74호 안악2호무덤
황해남도 안악군 대추리 산지 마을 뒤 언덕 중턱에 있는 고구려 벽화무덤 2기 중 뒤에 있는 것이다. 1949년 발견된 안악 제1호분을 조사․정리하던 과정에서 추가로 발견되었다. 무덤의 크기는 둘레가 약 9m, 후방의 높이가 3.5m, 전방의 높이가 약 5m로 남면은 원래의 형태를 잃었으나 동쪽 모서리에는 방대형의 기저부가 뚜렷이 남아 있다. 5세기 말~6세기 초에 해당하는 무덤으로 추정된다. 200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75호 안악월정사
황해남도 안악군 월정리에서 서북쪽으로 약 5km 떨어진 구월산 아사봉에 있다. 9세기 중엽에 처음 세워졌다고 전한다. 월정사는 처음 세워진 이래 여러 차례 보수․개건되었는데, 1650년(효종원년)부터 1871년(고종 8) 사이에 5차례나 보수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 초기에 다시 지은 것이다. 극락보전을 중심으로 명부전․수월당․만세루․재실 등으로 이루어졌다. 극락보전은 높이 약 1m의 정교한 기단 위에 세운 정면3칸(10.65m) 측면 2칸(6.4m)의 다포계 팔작집으로 조선 초기에 세워졌으며, 고려 말기의 건축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다.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아담하고 아름다운 맞배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75호 안악월정사
황해남도 안악군 월정리에서 서북쪽으로 약 5km 떨어진 구월산 아사봉에 있다. 9세기 중엽에 처음 세워졌다고 전한다. 월정사는 처음 세워진 이래 여러 차례 보수․개건되었는데, 1650년(효종원년)부터 1871년(고종 8) 사이에 5차례나 보수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 초기에 다시 지은 것이다. 극락보전을 중심으로 명부전․수월당․만세루․재실 등으로 이루어졌다. 극락보전은 높이 약 1m의 정교한 기단 위에 세운 정면3칸(10.65m) 측면 2칸(6.4m)의 다포계 팔작집으로 조선 초기에 세워졌으며, 고려 말기의 건축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다.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아담하고 아름다운 맞배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75호 안악월정사
황해남도 안악군 월정리에서 서북쪽으로 약 5km 떨어진 구월산 아사봉에 있다. 9세기 중엽에 처음 세워졌다고 전한다. 월정사는 처음 세워진 이래 여러 차례 보수․개건되었는데, 1650년(효종원년)부터 1871년(고종 8) 사이에 5차례나 보수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 초기에 다시 지은 것이다. 극락보전을 중심으로 명부전․수월당․만세루․재실 등으로 이루어졌다. 극락보전은 높이 약 1m의 정교한 기단 위에 세운 정면3칸(10.65m) 측면 2칸(6.4m)의 다포계 팔작집으로 조선 초기에 세워졌으며, 고려 말기의 건축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다.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아담하고 아름다운 맞배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75호 안악월정사
황해남도 안악군 월정리에서 서북쪽으로 약 5km 떨어진 구월산 아사봉에 있다. 9세기 중엽에 처음 세워졌다고 전한다. 월정사는 처음 세워진 이래 여러 차례 보수․개건되었는데, 1650년(효종원년)부터 1871년(고종 8) 사이에 5차례나 보수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 초기에 다시 지은 것이다. 극락보전을 중심으로 명부전․수월당․만세루․재실 등으로 이루어졌다. 극락보전은 높이 약 1m의 정교한 기단 위에 세운 정면3칸(10.65m) 측면 2칸(6.4m)의 다포계 팔작집으로 조선 초기에 세워졌으며, 고려 말기의 건축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다.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아담하고 아름다운 맞배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75호 안악월정사
황해남도 안악군 월정리에서 서북쪽으로 약 5km 떨어진 구월산 아사봉에 있다. 9세기 중엽에 처음 세워졌다고 전한다. 월정사는 처음 세워진 이래 여러 차례 보수․개건되었는데, 1650년(효종원년)부터 1871년(고종 8) 사이에 5차례나 보수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 초기에 다시 지은 것이다. 극락보전을 중심으로 명부전․수월당․만세루․재실 등으로 이루어졌다. 극락보전은 높이 약 1m의 정교한 기단 위에 세운 정면3칸(10.65m) 측면 2칸(6.4m)의 다포계 팔작집으로 조선 초기에 세워졌으며, 고려 말기의 건축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다.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아담하고 아름다운 맞배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76호 노암리고인돌
황해남도 안악군 노암리에 있는 고조선시대의 무덤으로 고인돌(지석묘, 支石墓)의 무덤형식으로 되어있다. 노암리고인돌은 네 면에 고임돌(판석, 板石)을 세우고, 그 위에 큰 판돌(상석, 上石)을 덮어 만들었다. 그 안에는 묘주의 시신과 부장품 등이 있다. 판돌의 크기는 길이가 7.7m, 너비는 6m이며, 두께는 0.46m이다. 이 고인돌의 내부공간은 길이가 4.14m이며, 너비가 2m, 높이가 2.4m 정도로 추정된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77호 강서사대웅전
강서사는 황해남도 백천군 강호리 백마산(견말산)에 위치한다. 1665년(현종 6년)에 건립된 《강서사사적비(江西寺事蹟碑)》에 의하면 도선스님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창건 후 크게 중수된 것은 고려 말이라 하며 그 후 임진왜란에 소실되었던 것을 원래 모습대로 복구하였지만 1651년(효종 2)에 다시 화재를 당해 대웅전을 비롯하여 동서에 있던 건물이 없어졌고, 현재의 대웅전은 1665년(현종6)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한다. 현재는 대웅전과 원래 오백나한전이었던 승방, 그리고 고려 때의 칠층석탑이 남아 있다. 대웅전은 규모가 정면5칸(16m) 측면3칸(8.62m)의 다포계 팔작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77호 강서사대웅전
강서사는 황해남도 백천군 강호리 백마산(견말산)에 위치한다. 1665년(현종 6년)에 건립된 《강서사사적비(江西寺事蹟碑)》에 의하면 도선스님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창건 후 크게 중수된 것은 고려 말이라 하며 그 후 임진왜란에 소실되었던 것을 원래 모습대로 복구하였지만 1651년(효종 2)에 다시 화재를 당해 대웅전을 비롯하여 동서에 있던 건물이 없어졌고, 현재의 대웅전은 1665년(현종6)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한다. 현재는 대웅전과 원래 오백나한전이었던 승방, 그리고 고려 때의 칠층석탑이 남아 있다. 대웅전은 규모가 정면5칸(16m) 측면3칸(8.62m)의 다포계 팔작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77호 강서사대웅전
강서사는 황해남도 백천군 강호리 백마산(견말산)에 위치한다. 1665년(현종 6년)에 건립된 《강서사사적비(江西寺事蹟碑)》에 의하면 도선스님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창건 후 크게 중수된 것은 고려 말이라 하며 그 후 임진왜란에 소실되었던 것을 원래 모습대로 복구하였지만 1651년(효종 2)에 다시 화재를 당해 대웅전을 비롯하여 동서에 있던 건물이 없어졌고, 현재의 대웅전은 1665년(현종6)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한다. 현재는 대웅전과 원래 오백나한전이었던 승방, 그리고 고려 때의 칠층석탑이 남아 있다. 대웅전은 규모가 정면5칸(16m) 측면3칸(8.62m)의 다포계 팔작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77호 강서사대웅전
강서사는 황해남도 백천군 강호리 백마산(견말산)에 위치한다. 1665년(현종 6년)에 건립된 《강서사사적비(江西寺事蹟碑)》에 의하면 도선스님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창건 후 크게 중수된 것은 고려 말이라 하며 그 후 임진왜란에 소실되었던 것을 원래 모습대로 복구하였지만 1651년(효종 2)에 다시 화재를 당해 대웅전을 비롯하여 동서에 있던 건물이 없어졌고, 현재의 대웅전은 1665년(현종6)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한다. 현재는 대웅전과 원래 오백나한전이었던 승방, 그리고 고려 때의 칠층석탑이 남아 있다. 대웅전은 규모가 정면5칸(16m) 측면3칸(8.62m)의 다포계 팔작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78호 룡동리고인돌
황해남도 배천군 용동리에 위치한 청동기시대 고인돌이다. 이 고인돌은 고임돌(판석, 板石)과 막음돌, 그리고 뚜껑돌(상석, 上石)로 이루어졌으며, 돌의 재료는 화강편마암으로 되어 있다. 뚜껑돌의 크기는 길이가 7.1m이고, 너비는 5m, 두께는 06~1m이다. 고인돌의 전체 높이는 3.1m이며, 동남방향으로 놓여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79호 소현서원
황해남도 벽성군 석담리에 있는 조선시대 서원이다. 이이가 1575년(선조 8) 이곳에 ꡐ청계당ꡑ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어 1577년(선조 10)에 은병정사를 짓고 그의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1586년(선조 10)에 사당을 건립하면서 ꡐ석담서원ꡑ으로 불렸는데, 당시에는 이이를 비롯한, 주희, 조광조, 이황을 모셨다. 왜란을 거치면서 서원의 대부분이 소실되고, 1604년(선조 37) 에 복원되었다. 1610년(광해군 2)에 ꡐ소현서원ꡑ이라는 명칭으로 사액을 받으면서 중창되었으며, 주희를 주향으로 하고 조광조, 이황, 이이, 성혼, 김장생, 송시열을 배향하였다. 1869년부터 1889년 사이에 서원철폐령으로 서원 기능을 상실하였고 한국전쟁 당시 상당부분 파손되었던 것을 복원하였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80호 자혜사
자혜사는 황해남도 신천군 서원리에 위치한다. 이 절은 초창이 언제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석등이나 석탑으로 보아 고려시대로 추측되고 있다. 조선 초기에는 효령대군의 원찰(願刹)이었다. 이 절에는 현재 대웅전과 승방, 그리고 오층석탑과 석등이 남아 있다. 본전인 대웅전은 그 규모가 정면3칸(9.28m) 측면4칸(9.25m)으로 된 정방형으로 전면 앞칸은 툇마루를 깐 트인 공간으로 되어 있다. 대웅전은 조선 초기 건물로 추정된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80호 자혜사
자혜사는 황해남도 신천군 서원리에 위치한다. 이 절은 초창이 언제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석등이나 석탑으로 보아 고려시대로 추측되고 있다. 조선 초기에는 효령대군의 원찰(願刹)이었다. 이 절에는 현재 대웅전과 승방, 그리고 오층석탑과 석등이 남아 있다. 본전인 대웅전은 그 규모가 정면3칸(9.28m) 측면4칸(9.25m)으로 된 정방형으로 전면 앞칸은 툇마루를 깐 트인 공간으로 되어 있다. 대웅전은 조선 초기 건물로 추정된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80호 자혜사
자혜사는 황해남도 신천군 서원리에 위치한다. 이 절은 초창이 언제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석등이나 석탑으로 보아 고려시대로 추측되고 있다. 조선 초기에는 효령대군의 원찰(願刹)이었다. 이 절에는 현재 대웅전과 승방, 그리고 오층석탑과 석등이 남아 있다. 본전인 대웅전은 그 규모가 정면3칸(9.28m) 측면4칸(9.25m)으로 된 정방형으로 전면 앞칸은 툇마루를 깐 트인 공간으로 되어 있다. 대웅전은 조선 초기 건물로 추정된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81호 묘음사현암
현암은 황해남도 재령군 서림리 장수산에 있다. 묘음사의 암자로 장수산 절벽에 있어 다람절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이 암자가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며 현존의 건물은 조선 초기 양식을 많이 간직하고 있어 임진왜란 이전의 건물로 보인다. 현존의 암자 건물은 규모가 정면 6칸(11.2m) 측면 3칸(6.35m)의 익공형식의 팔작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81호 묘음사현암
현암은 황해남도 재령군 서림리 장수산에 있다. 묘음사의 암자로 장수산 절벽에 있어 다람절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이 암자가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며 현존의 건물은 조선 초기 양식을 많이 간직하고 있어 임진왜란 이전의 건물로 보인다. 현존의 암자 건물은 규모가 정면 6칸(11.2m) 측면 3칸(6.35m)의 익공형식의 팔작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81호 묘음사현암
현암은 황해남도 재령군 서림리 장수산에 있다. 묘음사의 암자로 장수산 절벽에 있어 다람절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이 암자가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며 현존의 건물은 조선 초기 양식을 많이 간직하고 있어 임진왜란 이전의 건물로 보인다. 현존의 암자 건물은 규모가 정면 6칸(11.2m) 측면 3칸(6.35m)의 익공형식의 팔작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81호 묘음사현암
현암은 황해남도 재령군 서림리 장수산에 있다. 묘음사의 암자로 장수산 절벽에 있어 다람절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이 암자가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며 현존의 건물은 조선 초기 양식을 많이 간직하고 있어 임진왜란 이전의 건물로 보인다. 현존의 암자 건물은 규모가 정면 6칸(11.2m) 측면 3칸(6.35m)의 익공형식의 팔작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82호 해주다리니석당
황해남도 해주시 해청동에 있는 높이 5.3m의 고려시대 석당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83호 학림사5층탑
황해남도 장연군 장연읍 학림사터에 있다. 학림사는 신라 눌지왕(417~458) 때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하는 큰 사찰로 보광전을 중심으로 한 많은 법당과 해탈문을 비롯한 건물이 있었으나 한국전쟁 때 모두 타 버리고 현재는 석탑과 사적비만이 남아있다. 석탑은 여러 개의 석재로 지대를 마련하고 2층의 기단을 쌓았으며 그 위에 탑신부와 상륜을 장식한 일반형 석탑이다. 높이 6.62m이다. 이 석탑은 기단부의 생략화 경향과 탑신부 옥개석의 형식으로 보아 전형적인 고려시대 석탑 양식으로 추정된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83호 학림사5층탑
황해남도 장연군 장연읍 학림사터에 있다. 학림사는 신라 눌지왕(417~458) 때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하는 큰 사찰로 보광전을 중심으로 한 많은 법당과 해탈문을 비롯한 건물이 있었으나 한국전쟁 때 모두 타 버리고 현재는 석탑과 사적비만이 남아있다. 석탑은 여러 개의 석재로 지대를 마련하고 2층의 기단을 쌓았으며 그 위에 탑신부와 상륜을 장식한 일반형 석탑이다. 높이 6.62m이다. 이 석탑은 기단부의 생략화 경향과 탑신부 옥개석의 형식으로 보아 전형적인 고려시대 석탑 양식으로 추정된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83호 학림사5층탑
황해남도 장연군 장연읍 학림사터에 있다. 학림사는 신라 눌지왕(417~458) 때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하는 큰 사찰로 보광전을 중심으로 한 많은 법당과 해탈문을 비롯한 건물이 있었으나 한국전쟁 때 모두 타 버리고 현재는 석탑과 사적비만이 남아있다. 석탑은 여러 개의 석재로 지대를 마련하고 2층의 기단을 쌓았으며 그 위에 탑신부와 상륜을 장식한 일반형 석탑이다. 높이 6.62m이다. 이 석탑은 기단부의 생략화 경향과 탑신부 옥개석의 형식으로 보아 전형적인 고려시대 석탑 양식으로 추정된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83호 학림사5층탑
황해남도 장연군 장연읍 학림사터에 있다. 학림사는 신라 눌지왕(417~458) 때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하는 큰 사찰로 보광전을 중심으로 한 많은 법당과 해탈문을 비롯한 건물이 있었으나 한국전쟁 때 모두 타 버리고 현재는 석탑과 사적비만이 남아있다. 석탑은 여러 개의 석재로 지대를 마련하고 2층의 기단을 쌓았으며 그 위에 탑신부와 상륜을 장식한 일반형 석탑이다. 높이 6.62m이다. 이 석탑은 기단부의 생략화 경향과 탑신부 옥개석의 형식으로 보아 전형적인 고려시대 석탑 양식으로 추정된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84호 관산리고인돌
황해남도 은율군 관산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이다. 고인돌은 사방 3.5m, 너비 65cm 정도로 돋우어진 땅에 세워졌다. 고인돌의 규모는 길이가 3.3m, 너비 1.4m, 높이 2.15m이다. 덮개돌의 길이는 8.75m, 너비는 4.5m, 두께 31m이며 무게는 40톤에 달한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85호 광조사진철대사탑비
광조사 진철대사탑비는 937년(청태 4)에 죽은 진철대사(이엄)의 부도비로 황해남도 해주시 학현동 광조사에 위치하고 있다. 비(碑)에는 <광조사(廣照寺) 진철대사보월승공탑비(眞徹大師寶月乘空塔碑)>라고 각명되어 있다. 높이 3.7m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85호 광조사진철대사탑비
광조사 진철대사탑비는 937년(청태 4)에 죽은 진철대사(이엄)의 부도비로 황해남도 해주시 학현동 광조사에 위치하고 있다. 비(碑)에는 <광조사(廣照寺) 진철대사보월승공탑비(眞徹大師寶月乘空塔碑)>라고 각명되어 있다. 높이 3.7m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87호 성불사
성불사는 황해북도 사리원시 광성리 정방산의 주봉인 천성봉 기슭에 있다. 이 절의 초창(初創) 시기는 898년(효공왕2)이라고 전하며, 그 후 여러 차례 고쳐지어졌다고 한다. 현재 성불사에는 극락전, 응진전, 명부전, 청풍루, 운하당, 산신각 등 여섯 채의 건물과 오층석탑이 있다. 극락전은 1374년(공민왕 23)에 세워진 건물로 1530년(중종 25)과 1644년(인조 33)에 크게 고쳐져 원래의 모습에서 변한 것으로 생각되며,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크게 피해를 입었으나 전후에 다시 복구하였다. 극락전의 규모는 전면 3칸, 측면 2칸이며, 5량의 구조로 주심포계 형식의 맛배집이다. 응진전은 1327년(충숙왕14)에 건립되었으며, 1530년(중종25) 중수를 하였다. 응진전의 규모는 정면7칸(22.75m) 측면 3칸(6.7m)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87호 성불사
성불사는 황해북도 사리원시 광성리 정방산의 주봉인 천성봉 기슭에 있다. 이 절의 초창(初創) 시기는 898년(효공왕2)이라고 전하며, 그 후 여러 차례 고쳐지어졌다고 한다. 현재 성불사에는 극락전, 응진전, 명부전, 청풍루, 운하당, 산신각 등 여섯 채의 건물과 오층석탑이 있다. 극락전은 1374년(공민왕 23)에 세워진 건물로 1530년(중종 25)과 1644년(인조 33)에 크게 고쳐져 원래의 모습에서 변한 것으로 생각되며,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크게 피해를 입었으나 전후에 다시 복구하였다. 극락전의 규모는 전면 3칸, 측면 2칸이며, 5량의 구조로 주심포계 형식의 맛배집이다. 응진전은 1327년(충숙왕14)에 건립되었으며, 1530년(중종25) 중수를 하였다. 응진전의 규모는 정면7칸(22.75m) 측면 3칸(6.7m)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87호 성불사
성불사는 황해북도 사리원시 광성리 정방산의 주봉인 천성봉 기슭에 있다. 이 절의 초창(初創) 시기는 898년(효공왕2)이라고 전하며, 그 후 여러 차례 고쳐지어졌다고 한다. 현재 성불사에는 극락전, 응진전, 명부전, 청풍루, 운하당, 산신각 등 여섯 채의 건물과 오층석탑이 있다. 극락전은 1374년(공민왕 23)에 세워진 건물로 1530년(중종 25)과 1644년(인조 33)에 크게 고쳐져 원래의 모습에서 변한 것으로 생각되며,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크게 피해를 입었으나 전후에 다시 복구하였다. 극락전의 규모는 전면 3칸, 측면 2칸이며, 5량의 구조로 주심포계 형식의 맛배집이다. 응진전은 1327년(충숙왕14)에 건립되었으며, 1530년(중종25) 중수를 하였다. 응진전의 규모는 정면7칸(22.75m) 측면 3칸(6.7m)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87호 성불사
성불사는 황해북도 사리원시 광성리 정방산의 주봉인 천성봉 기슭에 있다. 이 절의 초창(初創) 시기는 898년(효공왕2)이라고 전하며, 그 후 여러 차례 고쳐지어졌다고 한다. 현재 성불사에는 극락전, 응진전, 명부전, 청풍루, 운하당, 산신각 등 여섯 채의 건물과 오층석탑이 있다. 극락전은 1374년(공민왕 23)에 세워진 건물로 1530년(중종 25)과 1644년(인조 33)에 크게 고쳐져 원래의 모습에서 변한 것으로 생각되며,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크게 피해를 입었으나 전후에 다시 복구하였다. 극락전의 규모는 전면 3칸, 측면 2칸이며, 5량의 구조로 주심포계 형식의 맛배집이다. 응진전은 1327년(충숙왕14)에 건립되었으며, 1530년(중종25) 중수를 하였다. 응진전의 규모는 정면7칸(22.75m) 측면 3칸(6.7m)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87호 성불사
성불사는 황해북도 사리원시 광성리 정방산의 주봉인 천성봉 기슭에 있다. 이 절의 초창(初創) 시기는 898년(효공왕2)이라고 전하며, 그 후 여러 차례 고쳐지어졌다고 한다. 현재 성불사에는 극락전, 응진전, 명부전, 청풍루, 운하당, 산신각 등 여섯 채의 건물과 오층석탑이 있다. 극락전은 1374년(공민왕 23)에 세워진 건물로 1530년(중종 25)과 1644년(인조 33)에 크게 고쳐져 원래의 모습에서 변한 것으로 생각되며,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크게 피해를 입었으나 전후에 다시 복구하였다. 극락전의 규모는 전면 3칸, 측면 2칸이며, 5량의 구조로 주심포계 형식의 맛배집이다. 응진전은 1327년(충숙왕14)에 건립되었으며, 1530년(중종25) 중수를 하였다. 응진전의 규모는 정면7칸(22.75m) 측면 3칸(6.7m)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87호 성불사
성불사는 황해북도 사리원시 광성리 정방산의 주봉인 천성봉 기슭에 있다. 이 절의 초창(初創) 시기는 898년(효공왕2)이라고 전하며, 그 후 여러 차례 고쳐지어졌다고 한다. 현재 성불사에는 극락전, 응진전, 명부전, 청풍루, 운하당, 산신각 등 여섯 채의 건물과 오층석탑이 있다. 극락전은 1374년(공민왕 23)에 세워진 건물로 1530년(중종 25)과 1644년(인조 33)에 크게 고쳐져 원래의 모습에서 변한 것으로 생각되며,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크게 피해를 입었으나 전후에 다시 복구하였다. 극락전의 규모는 전면 3칸, 측면 2칸이며, 5량의 구조로 주심포계 형식의 맛배집이다. 응진전은 1327년(충숙왕14)에 건립되었으며, 1530년(중종25) 중수를 하였다. 응진전의 규모는 정면7칸(22.75m) 측면 3칸(6.7m)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87호 성불사
성불사는 황해북도 사리원시 광성리 정방산의 주봉인 천성봉 기슭에 있다. 이 절의 초창(初創) 시기는 898년(효공왕2)이라고 전하며, 그 후 여러 차례 고쳐지어졌다고 한다. 현재 성불사에는 극락전, 응진전, 명부전, 청풍루, 운하당, 산신각 등 여섯 채의 건물과 오층석탑이 있다. 극락전은 1374년(공민왕 23)에 세워진 건물로 1530년(중종 25)과 1644년(인조 33)에 크게 고쳐져 원래의 모습에서 변한 것으로 생각되며,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크게 피해를 입었으나 전후에 다시 복구하였다. 극락전의 규모는 전면 3칸, 측면 2칸이며, 5량의 구조로 주심포계 형식의 맛배집이다. 응진전은 1327년(충숙왕14)에 건립되었으며, 1530년(중종25) 중수를 하였다. 응진전의 규모는 정면7칸(22.75m) 측면 3칸(6.7m)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87호 성불사
성불사는 황해북도 사리원시 광성리 정방산의 주봉인 천성봉 기슭에 있다. 이 절의 초창(初創) 시기는 898년(효공왕2)이라고 전하며, 그 후 여러 차례 고쳐지어졌다고 한다. 현재 성불사에는 극락전, 응진전, 명부전, 청풍루, 운하당, 산신각 등 여섯 채의 건물과 오층석탑이 있다. 극락전은 1374년(공민왕 23)에 세워진 건물로 1530년(중종 25)과 1644년(인조 33)에 크게 고쳐져 원래의 모습에서 변한 것으로 생각되며,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크게 피해를 입었으나 전후에 다시 복구하였다. 극락전의 규모는 전면 3칸, 측면 2칸이며, 5량의 구조로 주심포계 형식의 맛배집이다. 응진전은 1327년(충숙왕14)에 건립되었으며, 1530년(중종25) 중수를 하였다. 응진전의 규모는 정면7칸(22.75m) 측면 3칸(6.7m)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87호 성불사
성불사는 황해북도 사리원시 광성리 정방산의 주봉인 천성봉 기슭에 있다. 이 절의 초창(初創) 시기는 898년(효공왕2)이라고 전하며, 그 후 여러 차례 고쳐지어졌다고 한다. 현재 성불사에는 극락전, 응진전, 명부전, 청풍루, 운하당, 산신각 등 여섯 채의 건물과 오층석탑이 있다. 극락전은 1374년(공민왕 23)에 세워진 건물로 1530년(중종 25)과 1644년(인조 33)에 크게 고쳐져 원래의 모습에서 변한 것으로 생각되며,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크게 피해를 입었으나 전후에 다시 복구하였다. 극락전의 규모는 전면 3칸, 측면 2칸이며, 5량의 구조로 주심포계 형식의 맛배집이다. 응진전은 1327년(충숙왕14)에 건립되었으며, 1530년(중종25) 중수를 하였다. 응진전의 규모는 정면7칸(22.75m) 측면 3칸(6.7m)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87호 성불사
성불사는 황해북도 사리원시 광성리 정방산의 주봉인 천성봉 기슭에 있다. 이 절의 초창(初創) 시기는 898년(효공왕2)이라고 전하며, 그 후 여러 차례 고쳐지어졌다고 한다. 현재 성불사에는 극락전, 응진전, 명부전, 청풍루, 운하당, 산신각 등 여섯 채의 건물과 오층석탑이 있다. 극락전은 1374년(공민왕 23)에 세워진 건물로 1530년(중종 25)과 1644년(인조 33)에 크게 고쳐져 원래의 모습에서 변한 것으로 생각되며,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크게 피해를 입었으나 전후에 다시 복구하였다. 극락전의 규모는 전면 3칸, 측면 2칸이며, 5량의 구조로 주심포계 형식의 맛배집이다. 응진전은 1327년(충숙왕14)에 건립되었으며, 1530년(중종25) 중수를 하였다. 응진전의 규모는 정면7칸(22.75m) 측면 3칸(6.7m)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87호 성불사
성불사는 황해북도 사리원시 광성리 정방산의 주봉인 천성봉 기슭에 있다. 이 절의 초창(初創) 시기는 898년(효공왕2)이라고 전하며, 그 후 여러 차례 고쳐지어졌다고 한다. 현재 성불사에는 극락전, 응진전, 명부전, 청풍루, 운하당, 산신각 등 여섯 채의 건물과 오층석탑이 있다. 극락전은 1374년(공민왕 23)에 세워진 건물로 1530년(중종 25)과 1644년(인조 33)에 크게 고쳐져 원래의 모습에서 변한 것으로 생각되며,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크게 피해를 입었으나 전후에 다시 복구하였다. 극락전의 규모는 전면 3칸, 측면 2칸이며, 5량의 구조로 주심포계 형식의 맛배집이다. 응진전은 1327년(충숙왕14)에 건립되었으며, 1530년(중종25) 중수를 하였다. 응진전의 규모는 정면7칸(22.75m) 측면 3칸(6.7m)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87호 성불사
성불사는 황해북도 사리원시 광성리 정방산의 주봉인 천성봉 기슭에 있다. 이 절의 초창(初創) 시기는 898년(효공왕2)이라고 전하며, 그 후 여러 차례 고쳐지어졌다고 한다. 현재 성불사에는 극락전, 응진전, 명부전, 청풍루, 운하당, 산신각 등 여섯 채의 건물과 오층석탑이 있다. 극락전은 1374년(공민왕 23)에 세워진 건물로 1530년(중종 25)과 1644년(인조 33)에 크게 고쳐져 원래의 모습에서 변한 것으로 생각되며,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크게 피해를 입었으나 전후에 다시 복구하였다. 극락전의 규모는 전면 3칸, 측면 2칸이며, 5량의 구조로 주심포계 형식의 맛배집이다. 응진전은 1327년(충숙왕14)에 건립되었으며, 1530년(중종25) 중수를 하였다. 응진전의 규모는 정면7칸(22.75m) 측면 3칸(6.7m)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87호 성불사
성불사는 황해북도 사리원시 광성리 정방산의 주봉인 천성봉 기슭에 있다. 이 절의 초창(初創) 시기는 898년(효공왕2)이라고 전하며, 그 후 여러 차례 고쳐지어졌다고 한다. 현재 성불사에는 극락전, 응진전, 명부전, 청풍루, 운하당, 산신각 등 여섯 채의 건물과 오층석탑이 있다. 극락전은 1374년(공민왕 23)에 세워진 건물로 1530년(중종 25)과 1644년(인조 33)에 크게 고쳐져 원래의 모습에서 변한 것으로 생각되며,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크게 피해를 입었으나 전후에 다시 복구하였다. 극락전의 규모는 전면 3칸, 측면 2칸이며, 5량의 구조로 주심포계 형식의 맛배집이다. 응진전은 1327년(충숙왕14)에 건립되었으며, 1530년(중종25) 중수를 하였다. 응진전의 규모는 정면7칸(22.75m) 측면 3칸(6.7m)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87호 성불사
성불사는 황해북도 사리원시 광성리 정방산의 주봉인 천성봉 기슭에 있다. 이 절의 초창(初創) 시기는 898년(효공왕2)이라고 전하며, 그 후 여러 차례 고쳐지어졌다고 한다. 현재 성불사에는 극락전, 응진전, 명부전, 청풍루, 운하당, 산신각 등 여섯 채의 건물과 오층석탑이 있다. 극락전은 1374년(공민왕 23)에 세워진 건물로 1530년(중종 25)과 1644년(인조 33)에 크게 고쳐져 원래의 모습에서 변한 것으로 생각되며,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크게 피해를 입었으나 전후에 다시 복구하였다. 극락전의 규모는 전면 3칸, 측면 2칸이며, 5량의 구조로 주심포계 형식의 맛배집이다. 응진전은 1327년(충숙왕14)에 건립되었으며, 1530년(중종25) 중수를 하였다. 응진전의 규모는 정면7칸(22.75m) 측면 3칸(6.7m)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88호 정방루
황해북도 사리원시에 있는 정방산성 정문에 해당되는 남문의 문루이다. 정방산성은 고려 때에 처음 세워졌다. 남문은 산성의 정문으로 홍예문을 가진 높은 석축 위에 문루를 세웠다. 문루는 정면3칸(13.85m) 측면 3칸(7.2m)의 단층 팔작집이다. 한국전쟁시 폭격으로 파괴되었으나, 1968년 원상대로 복구되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88호 정방루
황해북도 사리원시에 있는 정방산성 정문에 해당되는 남문의 문루이다. 정방산성은 고려 때에 처음 세워졌다. 남문은 산성의 정문으로 홍예문을 가진 높은 석축 위에 문루를 세웠다. 문루는 정면3칸(13.85m) 측면 3칸(7.2m)의 단층 팔작집이다. 한국전쟁시 폭격으로 파괴되었으나, 1968년 원상대로 복구되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89호 정방산성
황해북도 사리원시 정방리 정방산에 있다. 정방산성은 우리나라 서부의 남북을 이어주는 주요한 교통로를 지키는 천혜의 요충지에 선 산성으로 고려시기에 처음 세워진 것이다. 산성의 북쪽은 가파른 산세를 그대로 이용하여 성벽을 가지지 않고 남산령, 기봉산 등성이와 정방골을 싸고돈다. 성벽은 납작하고 거칠게 다듬은 성돌로 쌓았다. 가장 낮은 남쪽으로는 10m가 넘는 높은 성벽을 쌓았으며 전체적으로는 5~6m의 석축을 쌓았다. 둘레는 12km 가량이다. 성내에는 49개의 절터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 남아 있는 것으로는 고려 말의 건축인 극락전․응진전 등을 가지고 있는 성불사가 유명하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89호 정방산성
황해북도 사리원시 정방리 정방산에 있다. 정방산성은 우리나라 서부의 남북을 이어주는 주요한 교통로를 지키는 천혜의 요충지에 선 산성으로 고려시기에 처음 세워진 것이다. 산성의 북쪽은 가파른 산세를 그대로 이용하여 성벽을 가지지 않고 남산령, 기봉산 등성이와 정방골을 싸고돈다. 성벽은 납작하고 거칠게 다듬은 성돌로 쌓았다. 가장 낮은 남쪽으로는 10m가 넘는 높은 성벽을 쌓았으며 전체적으로는 5~6m의 석축을 쌓았다. 둘레는 12km 가량이다. 성내에는 49개의 절터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 남아 있는 것으로는 고려 말의 건축인 극락전․응진전 등을 가지고 있는 성불사가 유명하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89호 정방산성
황해북도 사리원시 정방리 정방산에 있다. 정방산성은 우리나라 서부의 남북을 이어주는 주요한 교통로를 지키는 천혜의 요충지에 선 산성으로 고려시기에 처음 세워진 것이다. 산성의 북쪽은 가파른 산세를 그대로 이용하여 성벽을 가지지 않고 남산령, 기봉산 등성이와 정방골을 싸고돈다. 성벽은 납작하고 거칠게 다듬은 성돌로 쌓았다. 가장 낮은 남쪽으로는 10m가 넘는 높은 성벽을 쌓았으며 전체적으로는 5~6m의 석축을 쌓았다. 둘레는 12km 가량이다. 성내에는 49개의 절터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 남아 있는 것으로는 고려 말의 건축인 극락전․응진전 등을 가지고 있는 성불사가 유명하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89호 정방산성
황해북도 사리원시 정방리 정방산에 있다. 정방산성은 우리나라 서부의 남북을 이어주는 주요한 교통로를 지키는 천혜의 요충지에 선 산성으로 고려시기에 처음 세워진 것이다. 산성의 북쪽은 가파른 산세를 그대로 이용하여 성벽을 가지지 않고 남산령, 기봉산 등성이와 정방골을 싸고돈다. 성벽은 납작하고 거칠게 다듬은 성돌로 쌓았다. 가장 낮은 남쪽으로는 10m가 넘는 높은 성벽을 쌓았으며 전체적으로는 5~6m의 석축을 쌓았다. 둘레는 12km 가량이다. 성내에는 49개의 절터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 남아 있는 것으로는 고려 말의 건축인 극락전․응진전 등을 가지고 있는 성불사가 유명하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89호 정방산성
황해북도 사리원시 정방리 정방산에 있다. 정방산성은 우리나라 서부의 남북을 이어주는 주요한 교통로를 지키는 천혜의 요충지에 선 산성으로 고려시기에 처음 세워진 것이다. 산성의 북쪽은 가파른 산세를 그대로 이용하여 성벽을 가지지 않고 남산령, 기봉산 등성이와 정방골을 싸고돈다. 성벽은 납작하고 거칠게 다듬은 성돌로 쌓았다. 가장 낮은 남쪽으로는 10m가 넘는 높은 성벽을 쌓았으며 전체적으로는 5~6m의 석축을 쌓았다. 둘레는 12km 가량이다. 성내에는 49개의 절터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 남아 있는 것으로는 고려 말의 건축인 극락전․응진전 등을 가지고 있는 성불사가 유명하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90호 성장김성업비
황해북도 사리원시 성문동에 위치한 이 비는 정방산성의 성장(城將) 김성업(金成業)의 업적을 찬양하여 조선 1879년(고종 16)에 세운 비석이다. 비는 정방산성 남문에서 성 안으로 들어가는 길목 왼쪽에 있다. 비석의 형식은 화강석의 기대석과 비신석으로 이루어졌는데, 비신은 위가 아래쪽보다 넓은 홀형태이다. 비석의 전체높이는 1.5m이고, 비신의 높이는 1.16m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91호 연탄심원사
심원사는 황해북도 연탄군 연탄읍에서 서남쪽으로 약 8km 떨어진 자비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심원사는 초창 연대가 언제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사적비에 의하면 1374년(공민왕 23)에 고쳐짓고, 그 후 여러 차례 보수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절은 보광전을 중심으로 응진전, 향로각, 청풍루, 칠성각 등 다섯 건물로 이루어졌다. 보광전은 정면3칸(10.98m) 측면3칸(7.55m)의 규모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91호 연탄심원사
심원사는 황해북도 연탄군 연탄읍에서 서남쪽으로 약 8km 떨어진 자비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심원사는 초창 연대가 언제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사적비에 의하면 1374년(공민왕 23)에 고쳐짓고, 그 후 여러 차례 보수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절은 보광전을 중심으로 응진전, 향로각, 청풍루, 칠성각 등 다섯 건물로 이루어졌다. 보광전은 정면3칸(10.98m) 측면3칸(7.55m)의 규모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91호 연탄심원사
심원사는 황해북도 연탄군 연탄읍에서 서남쪽으로 약 8km 떨어진 자비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심원사는 초창 연대가 언제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사적비에 의하면 1374년(공민왕 23)에 고쳐짓고, 그 후 여러 차례 보수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절은 보광전을 중심으로 응진전, 향로각, 청풍루, 칠성각 등 다섯 건물로 이루어졌다. 보광전은 정면3칸(10.98m) 측면3칸(7.55m)의 규모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91호 연탄심원사
심원사는 황해북도 연탄군 연탄읍에서 서남쪽으로 약 8km 떨어진 자비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심원사는 초창 연대가 언제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사적비에 의하면 1374년(공민왕 23)에 고쳐짓고, 그 후 여러 차례 보수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절은 보광전을 중심으로 응진전, 향로각, 청풍루, 칠성각 등 다섯 건물로 이루어졌다. 보광전은 정면3칸(10.98m) 측면3칸(7.55m)의 규모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91호 연탄심원사
심원사는 황해북도 연탄군 연탄읍에서 서남쪽으로 약 8km 떨어진 자비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심원사는 초창 연대가 언제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사적비에 의하면 1374년(공민왕 23)에 고쳐짓고, 그 후 여러 차례 보수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절은 보광전을 중심으로 응진전, 향로각, 청풍루, 칠성각 등 다섯 건물로 이루어졌다. 보광전은 정면3칸(10.98m) 측면3칸(7.55m)의 규모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91호 연탄심원사
심원사는 황해북도 연탄군 연탄읍에서 서남쪽으로 약 8km 떨어진 자비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심원사는 초창 연대가 언제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사적비에 의하면 1374년(공민왕 23)에 고쳐짓고, 그 후 여러 차례 보수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절은 보광전을 중심으로 응진전, 향로각, 청풍루, 칠성각 등 다섯 건물로 이루어졌다. 보광전은 정면3칸(10.98m) 측면3칸(7.55m)의 규모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92호 귀진사
황해북도 서흥군 송월리 숭덕산에 위치한다. 원래는 성숙사 소속의 암자였는데 16세기 중엽 보우스님에 의해 크게 확장되어 큰절이 되었다고 한다. 귀진사는 여러 종류의 불경 목판을 보관한 절로 유명하다. 귀진사는 극락전을 본전으로 하고 그 앞에 주악루가 있다. 극락전은 1709년(숙종 35)에 쓰여진 <귀진사사적비(歸進寺事蹟碑)>에 의하면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에 중수되고 그 이후 몇 차례의 보수가 있었다. 극락전은 자연석 기단 위에 정면3칸(10.95m) 측면3칸(7.35m)의 5량 구조로 된 다포계 팔작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92호 귀진사
황해북도 서흥군 송월리 숭덕산에 위치한다. 원래는 성숙사 소속의 암자였는데 16세기 중엽 보우스님에 의해 크게 확장되어 큰절이 되었다고 한다. 귀진사는 여러 종류의 불경 목판을 보관한 절로 유명하다. 귀진사는 극락전을 본전으로 하고 그 앞에 주악루가 있다. 극락전은 1709년(숙종 35)에 쓰여진 <귀진사사적비(歸進寺事蹟碑)>에 의하면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에 중수되고 그 이후 몇 차례의 보수가 있었다. 극락전은 자연석 기단 위에 정면3칸(10.95m) 측면3칸(7.35m)의 5량 구조로 된 다포계 팔작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92호 귀진사
황해북도 서흥군 송월리 숭덕산에 위치한다. 원래는 성숙사 소속의 암자였는데 16세기 중엽 보우스님에 의해 크게 확장되어 큰절이 되었다고 한다. 귀진사는 여러 종류의 불경 목판을 보관한 절로 유명하다. 귀진사는 극락전을 본전으로 하고 그 앞에 주악루가 있다. 극락전은 1709년(숙종 35)에 쓰여진 <귀진사사적비(歸進寺事蹟碑)>에 의하면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에 중수되고 그 이후 몇 차례의 보수가 있었다. 극락전은 자연석 기단 위에 정면3칸(10.95m) 측면3칸(7.35m)의 5량 구조로 된 다포계 팔작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92호 귀진사
황해북도 서흥군 송월리 숭덕산에 위치한다. 원래는 성숙사 소속의 암자였는데 16세기 중엽 보우스님에 의해 크게 확장되어 큰절이 되었다고 한다. 귀진사는 여러 종류의 불경 목판을 보관한 절로 유명하다. 귀진사는 극락전을 본전으로 하고 그 앞에 주악루가 있다. 극락전은 1709년(숙종 35)에 쓰여진 <귀진사사적비(歸進寺事蹟碑)>에 의하면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에 중수되고 그 이후 몇 차례의 보수가 있었다. 극락전은 자연석 기단 위에 정면3칸(10.95m) 측면3칸(7.35m)의 5량 구조로 된 다포계 팔작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92호 귀진사
황해북도 서흥군 송월리 숭덕산에 위치한다. 원래는 성숙사 소속의 암자였는데 16세기 중엽 보우스님에 의해 크게 확장되어 큰절이 되었다고 한다. 귀진사는 여러 종류의 불경 목판을 보관한 절로 유명하다. 귀진사는 극락전을 본전으로 하고 그 앞에 주악루가 있다. 극락전은 1709년(숙종 35)에 쓰여진 <귀진사사적비(歸進寺事蹟碑)>에 의하면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에 중수되고 그 이후 몇 차례의 보수가 있었다. 극락전은 자연석 기단 위에 정면3칸(10.95m) 측면3칸(7.35m)의 5량 구조로 된 다포계 팔작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92호 귀진사
황해북도 서흥군 송월리 숭덕산에 위치한다. 원래는 성숙사 소속의 암자였는데 16세기 중엽 보우스님에 의해 크게 확장되어 큰절이 되었다고 한다. 귀진사는 여러 종류의 불경 목판을 보관한 절로 유명하다. 귀진사는 극락전을 본전으로 하고 그 앞에 주악루가 있다. 극락전은 1709년(숙종 35)에 쓰여진 <귀진사사적비(歸進寺事蹟碑)>에 의하면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에 중수되고 그 이후 몇 차례의 보수가 있었다. 극락전은 자연석 기단 위에 정면3칸(10.95m) 측면3칸(7.35m)의 5량 구조로 된 다포계 팔작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93호 태백산성
황해북도 평산군 산성리 태백산에 있는 고구려시기의 산성이다. 태백산성은 성황산성이라고 불려오다 조선시대에 성을 보수하고 태백산성으로 고쳐 불렀다. 태백산성은 태백산의 산세와 능선을 이용하여 성벽을 쌓았으며, 동쪽의 성벽은 예성강 연안의 절벽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성벽의 둘레는 2.425km이고, 높이는 약 7m이다. 성문은 사방에 홍예문으로 만들었는데, 동문과 서문에는 18세기에 고쳐 세운 문루가 아직 남아있다. 동문은 임진왜란 후 1777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93호 태백산성
황해북도 평산군 산성리 태백산에 있는 고구려시기의 산성이다. 태백산성은 성황산성이라고 불려오다 조선시대에 성을 보수하고 태백산성으로 고쳐 불렀다. 태백산성은 태백산의 산세와 능선을 이용하여 성벽을 쌓았으며, 동쪽의 성벽은 예성강 연안의 절벽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성벽의 둘레는 2.425km이고, 높이는 약 7m이다. 성문은 사방에 홍예문으로 만들었는데, 동문과 서문에는 18세기에 고쳐 세운 문루가 아직 남아있다. 동문은 임진왜란 후 1777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93호 태백산성
황해북도 평산군 산성리 태백산에 있는 고구려시기의 산성이다. 태백산성은 성황산성이라고 불려오다 조선시대에 성을 보수하고 태백산성으로 고쳐 불렀다. 태백산성은 태백산의 산세와 능선을 이용하여 성벽을 쌓았으며, 동쪽의 성벽은 예성강 연안의 절벽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성벽의 둘레는 2.425km이고, 높이는 약 7m이다. 성문은 사방에 홍예문으로 만들었는데, 동문과 서문에는 18세기에 고쳐 세운 문루가 아직 남아있다. 동문은 임진왜란 후 1777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93호 태백산성
황해북도 평산군 산성리 태백산에 있는 고구려시기의 산성이다. 태백산성은 성황산성이라고 불려오다 조선시대에 성을 보수하고 태백산성으로 고쳐 불렀다. 태백산성은 태백산의 산세와 능선을 이용하여 성벽을 쌓았으며, 동쪽의 성벽은 예성강 연안의 절벽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성벽의 둘레는 2.425km이고, 높이는 약 7m이다. 성문은 사방에 홍예문으로 만들었는데, 동문과 서문에는 18세기에 고쳐 세운 문루가 아직 남아있다. 동문은 임진왜란 후 1777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93호 태백산성
황해북도 평산군 산성리 태백산에 있는 고구려시기의 산성이다. 태백산성은 성황산성이라고 불려오다 조선시대에 성을 보수하고 태백산성으로 고쳐 불렀다. 태백산성은 태백산의 산세와 능선을 이용하여 성벽을 쌓았으며, 동쪽의 성벽은 예성강 연안의 절벽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성벽의 둘레는 2.425km이고, 높이는 약 7m이다. 성문은 사방에 홍예문으로 만들었는데, 동문과 서문에는 18세기에 고쳐 세운 문루가 아직 남아있다. 동문은 임진왜란 후 1777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94호 석왕사
석왕사는 강원도 고산군 설봉리에 있는 고려시대 말에서 조선시대 초에 이르는 사찰이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조선 태조 때 세워졌고, 양로사와 함께 설봉산에 있다고 하였다. 한국전쟁 시 대웅전을 비롯한 수많은 건물들이 소실되었고, 현재 호지문, 조계문, 설성동루 등 몇 동의 건물들만 남아 있다. 호지문은 이 사찰의 중심인 대웅전 앞에 있는 문이다. 불규칙한 장대석으로 된 석축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맞배집으로 1392년(태조 원년)에 세워졌으나 한국전쟁 시에 소실되었고, 현재의 문은 전후에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복구되었다. 석왕사의 중심 건물인 대웅전은 1951년에 소실되었지만, 일제시대의 자료인 《조선고적도보》12권에 사진으로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94호 석왕사
석왕사는 강원도 고산군 설봉리에 있는 고려시대 말에서 조선시대 초에 이르는 사찰이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조선 태조 때 세워졌고, 양로사와 함께 설봉산에 있다고 하였다. 한국전쟁 시 대웅전을 비롯한 수많은 건물들이 소실되었고, 현재 호지문, 조계문, 설성동루 등 몇 동의 건물들만 남아 있다. 호지문은 이 사찰의 중심인 대웅전 앞에 있는 문이다. 불규칙한 장대석으로 된 석축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맞배집으로 1392년(태조 원년)에 세워졌으나 한국전쟁 시에 소실되었고, 현재의 문은 전후에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복구되었다. 석왕사의 중심 건물인 대웅전은 1951년에 소실되었지만, 일제시대의 자료인 《조선고적도보》12권에 사진으로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94호 석왕사
석왕사는 강원도 고산군 설봉리에 있는 고려시대 말에서 조선시대 초에 이르는 사찰이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조선 태조 때 세워졌고, 양로사와 함께 설봉산에 있다고 하였다. 한국전쟁 시 대웅전을 비롯한 수많은 건물들이 소실되었고, 현재 호지문, 조계문, 설성동루 등 몇 동의 건물들만 남아 있다. 호지문은 이 사찰의 중심인 대웅전 앞에 있는 문이다. 불규칙한 장대석으로 된 석축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맞배집으로 1392년(태조 원년)에 세워졌으나 한국전쟁 시에 소실되었고, 현재의 문은 전후에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복구되었다. 석왕사의 중심 건물인 대웅전은 1951년에 소실되었지만, 일제시대의 자료인 《조선고적도보》12권에 사진으로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94호 석왕사
석왕사는 강원도 고산군 설봉리에 있는 고려시대 말에서 조선시대 초에 이르는 사찰이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조선 태조 때 세워졌고, 양로사와 함께 설봉산에 있다고 하였다. 한국전쟁 시 대웅전을 비롯한 수많은 건물들이 소실되었고, 현재 호지문, 조계문, 설성동루 등 몇 동의 건물들만 남아 있다. 호지문은 이 사찰의 중심인 대웅전 앞에 있는 문이다. 불규칙한 장대석으로 된 석축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맞배집으로 1392년(태조 원년)에 세워졌으나 한국전쟁 시에 소실되었고, 현재의 문은 전후에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복구되었다. 석왕사의 중심 건물인 대웅전은 1951년에 소실되었지만, 일제시대의 자료인 《조선고적도보》12권에 사진으로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95호 신계사
신계사는 장안사․표훈사․유점사와 함께 금강산 4대 사찰 중에 하나이다. 구룡연으로 가는 외금강 입구의 신계천 옆 관음연봉의 한 줄기인 문필봉을 등지고 자리 잡고 있다. 519년(법흥왕 6)에 창건되어 오랜 세월동안 34차례의 보수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519년은 신라의 불교 공인 이전이므로 그 창건 시기에 대하여 확신할 수는 없다. 신계사는 한국전생시에 모두 소실되었으나, 현재 조계종에 의해 2004년 대웅보전을 비롯한 여러 전각이 복원되었다. 신계사 삼층석탑은 금강산에 있는 정양사 3층탑, 장연사 3층탑과 함께 ꡒ금강산의 세 옛 탑ꡓ으로 불리우는 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95호 신계사
신계사는 장안사․표훈사․유점사와 함께 금강산 4대 사찰 중에 하나이다. 구룡연으로 가는 외금강 입구의 신계천 옆 관음연봉의 한 줄기인 문필봉을 등지고 자리 잡고 있다. 519년(법흥왕 6)에 창건되어 오랜 세월동안 34차례의 보수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519년은 신라의 불교 공인 이전이므로 그 창건 시기에 대하여 확신할 수는 없다. 신계사는 한국전생시에 모두 소실되었으나, 현재 조계종에 의해 2004년 대웅보전을 비롯한 여러 전각이 복원되었다. 신계사 삼층석탑은 금강산에 있는 정양사 3층탑, 장연사 3층탑과 함께 ꡒ금강산의 세 옛 탑ꡓ으로 불리우는 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95호 신계사
신계사는 장안사․표훈사․유점사와 함께 금강산 4대 사찰 중에 하나이다. 구룡연으로 가는 외금강 입구의 신계천 옆 관음연봉의 한 줄기인 문필봉을 등지고 자리 잡고 있다. 519년(법흥왕 6)에 창건되어 오랜 세월동안 34차례의 보수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519년은 신라의 불교 공인 이전이므로 그 창건 시기에 대하여 확신할 수는 없다. 신계사는 한국전생시에 모두 소실되었으나, 현재 조계종에 의해 2004년 대웅보전을 비롯한 여러 전각이 복원되었다. 신계사 삼층석탑은 금강산에 있는 정양사 3층탑, 장연사 3층탑과 함께 ꡒ금강산의 세 옛 탑ꡓ으로 불리우는 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96호 장안사
강원도 금강군 내강리 내금강 입구에서 만천을 따라 약 2km 가면 비홍교(만천다리) 건너편에 장안사터가 있다. 이 절은 금강산의 4대 사찰의 하나로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고려 때에 70여 채의 건물이 있었지만, 한국전쟁 때 모두 소실되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96호 장안사
강원도 금강군 내강리 내금강 입구에서 만천을 따라 약 2km 가면 비홍교(만천다리) 건너편에 장안사터가 있다. 이 절은 금강산의 4대 사찰의 하나로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고려 때에 70여 채의 건물이 있었지만, 한국전쟁 때 모두 소실되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96호 장안사
강원도 금강군 내강리 내금강 입구에서 만천을 따라 약 2km 가면 비홍교(만천다리) 건너편에 장안사터가 있다. 이 절은 금강산의 4대 사찰의 하나로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고려 때에 70여 채의 건물이 있었지만, 한국전쟁 때 모두 소실되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96호 장안사
강원도 금강군 내강리 내금강 입구에서 만천을 따라 약 2km 가면 비홍교(만천다리) 건너편에 장안사터가 있다. 이 절은 금강산의 4대 사찰의 하나로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고려 때에 70여 채의 건물이 있었지만, 한국전쟁 때 모두 소실되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96호 장안사
강원도 금강군 내강리 내금강 입구에서 만천을 따라 약 2km 가면 비홍교(만천다리) 건너편에 장안사터가 있다. 이 절은 금강산의 4대 사찰의 하나로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고려 때에 70여 채의 건물이 있었지만, 한국전쟁 때 모두 소실되었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97호 표훈사
강원도 금강군 내금강면 장연리에 있는 표훈사는 강원도 내금강 만폭동에 위치하고 있는 사찰로 금강산 4대 사찰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사찰이다. 《강원도지》에 의하면 670년(문무왕 10)에 신림사란 이름으로 창건되었다가 3년 후 표훈사로 이름을 고치고, 여러 차례 수리를 거친 후 오늘날의 모습에 이르렀다고 한다. 표훈사는 1459년(세조 5)에 보수, 1682년(숙종 8) 복원, 1778년(정조 1) 복원, 1864년(고종 원년) 보수기록을 통하여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쳤다. 표훈사는 원래 극락전을 중심으로 20여 동의 많은 전각이 있었지만 현재는 반야보전, 명부전, 영산전, 어실각, 칠성각, 능파루 등이 남아 있다. 사찰의 중심건물인 반야보전(般若寶殿)은 정면3칸(14.09m) 측면3칸(9.3m)의 다포계 팔작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97호 표훈사
강원도 금강군 내금강면 장연리에 있는 표훈사는 강원도 내금강 만폭동에 위치하고 있는 사찰로 금강산 4대 사찰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사찰이다. 《강원도지》에 의하면 670년(문무왕 10)에 신림사란 이름으로 창건되었다가 3년 후 표훈사로 이름을 고치고, 여러 차례 수리를 거친 후 오늘날의 모습에 이르렀다고 한다. 표훈사는 1459년(세조 5)에 보수, 1682년(숙종 8) 복원, 1778년(정조 1) 복원, 1864년(고종 원년) 보수기록을 통하여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쳤다. 표훈사는 원래 극락전을 중심으로 20여 동의 많은 전각이 있었지만 현재는 반야보전, 명부전, 영산전, 어실각, 칠성각, 능파루 등이 남아 있다. 사찰의 중심건물인 반야보전(般若寶殿)은 정면3칸(14.09m) 측면3칸(9.3m)의 다포계 팔작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97호 표훈사
강원도 금강군 내금강면 장연리에 있는 표훈사는 강원도 내금강 만폭동에 위치하고 있는 사찰로 금강산 4대 사찰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사찰이다. 《강원도지》에 의하면 670년(문무왕 10)에 신림사란 이름으로 창건되었다가 3년 후 표훈사로 이름을 고치고, 여러 차례 수리를 거친 후 오늘날의 모습에 이르렀다고 한다. 표훈사는 1459년(세조 5)에 보수, 1682년(숙종 8) 복원, 1778년(정조 1) 복원, 1864년(고종 원년) 보수기록을 통하여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쳤다. 표훈사는 원래 극락전을 중심으로 20여 동의 많은 전각이 있었지만 현재는 반야보전, 명부전, 영산전, 어실각, 칠성각, 능파루 등이 남아 있다. 사찰의 중심건물인 반야보전(般若寶殿)은 정면3칸(14.09m) 측면3칸(9.3m)의 다포계 팔작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97호 표훈사
강원도 금강군 내금강면 장연리에 있는 표훈사는 강원도 내금강 만폭동에 위치하고 있는 사찰로 금강산 4대 사찰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사찰이다. 《강원도지》에 의하면 670년(문무왕 10)에 신림사란 이름으로 창건되었다가 3년 후 표훈사로 이름을 고치고, 여러 차례 수리를 거친 후 오늘날의 모습에 이르렀다고 한다. 표훈사는 1459년(세조 5)에 보수, 1682년(숙종 8) 복원, 1778년(정조 1) 복원, 1864년(고종 원년) 보수기록을 통하여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쳤다. 표훈사는 원래 극락전을 중심으로 20여 동의 많은 전각이 있었지만 현재는 반야보전, 명부전, 영산전, 어실각, 칠성각, 능파루 등이 남아 있다. 사찰의 중심건물인 반야보전(般若寶殿)은 정면3칸(14.09m) 측면3칸(9.3m)의 다포계 팔작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97호 표훈사
강원도 금강군 내금강면 장연리에 있는 표훈사는 강원도 내금강 만폭동에 위치하고 있는 사찰로 금강산 4대 사찰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사찰이다. 《강원도지》에 의하면 670년(문무왕 10)에 신림사란 이름으로 창건되었다가 3년 후 표훈사로 이름을 고치고, 여러 차례 수리를 거친 후 오늘날의 모습에 이르렀다고 한다. 표훈사는 1459년(세조 5)에 보수, 1682년(숙종 8) 복원, 1778년(정조 1) 복원, 1864년(고종 원년) 보수기록을 통하여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쳤다. 표훈사는 원래 극락전을 중심으로 20여 동의 많은 전각이 있었지만 현재는 반야보전, 명부전, 영산전, 어실각, 칠성각, 능파루 등이 남아 있다. 사찰의 중심건물인 반야보전(般若寶殿)은 정면3칸(14.09m) 측면3칸(9.3m)의 다포계 팔작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97호 표훈사
강원도 금강군 내금강면 장연리에 있는 표훈사는 강원도 내금강 만폭동에 위치하고 있는 사찰로 금강산 4대 사찰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사찰이다. 《강원도지》에 의하면 670년(문무왕 10)에 신림사란 이름으로 창건되었다가 3년 후 표훈사로 이름을 고치고, 여러 차례 수리를 거친 후 오늘날의 모습에 이르렀다고 한다. 표훈사는 1459년(세조 5)에 보수, 1682년(숙종 8) 복원, 1778년(정조 1) 복원, 1864년(고종 원년) 보수기록을 통하여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쳤다. 표훈사는 원래 극락전을 중심으로 20여 동의 많은 전각이 있었지만 현재는 반야보전, 명부전, 영산전, 어실각, 칠성각, 능파루 등이 남아 있다. 사찰의 중심건물인 반야보전(般若寶殿)은 정면3칸(14.09m) 측면3칸(9.3m)의 다포계 팔작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97호 표훈사
강원도 금강군 내금강면 장연리에 있는 표훈사는 강원도 내금강 만폭동에 위치하고 있는 사찰로 금강산 4대 사찰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사찰이다. 《강원도지》에 의하면 670년(문무왕 10)에 신림사란 이름으로 창건되었다가 3년 후 표훈사로 이름을 고치고, 여러 차례 수리를 거친 후 오늘날의 모습에 이르렀다고 한다. 표훈사는 1459년(세조 5)에 보수, 1682년(숙종 8) 복원, 1778년(정조 1) 복원, 1864년(고종 원년) 보수기록을 통하여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쳤다. 표훈사는 원래 극락전을 중심으로 20여 동의 많은 전각이 있었지만 현재는 반야보전, 명부전, 영산전, 어실각, 칠성각, 능파루 등이 남아 있다. 사찰의 중심건물인 반야보전(般若寶殿)은 정면3칸(14.09m) 측면3칸(9.3m)의 다포계 팔작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97호 표훈사
강원도 금강군 내금강면 장연리에 있는 표훈사는 강원도 내금강 만폭동에 위치하고 있는 사찰로 금강산 4대 사찰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사찰이다. 《강원도지》에 의하면 670년(문무왕 10)에 신림사란 이름으로 창건되었다가 3년 후 표훈사로 이름을 고치고, 여러 차례 수리를 거친 후 오늘날의 모습에 이르렀다고 한다. 표훈사는 1459년(세조 5)에 보수, 1682년(숙종 8) 복원, 1778년(정조 1) 복원, 1864년(고종 원년) 보수기록을 통하여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쳤다. 표훈사는 원래 극락전을 중심으로 20여 동의 많은 전각이 있었지만 현재는 반야보전, 명부전, 영산전, 어실각, 칠성각, 능파루 등이 남아 있다. 사찰의 중심건물인 반야보전(般若寶殿)은 정면3칸(14.09m) 측면3칸(9.3m)의 다포계 팔작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97호 표훈사
강원도 금강군 내금강면 장연리에 있는 표훈사는 강원도 내금강 만폭동에 위치하고 있는 사찰로 금강산 4대 사찰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사찰이다. 《강원도지》에 의하면 670년(문무왕 10)에 신림사란 이름으로 창건되었다가 3년 후 표훈사로 이름을 고치고, 여러 차례 수리를 거친 후 오늘날의 모습에 이르렀다고 한다. 표훈사는 1459년(세조 5)에 보수, 1682년(숙종 8) 복원, 1778년(정조 1) 복원, 1864년(고종 원년) 보수기록을 통하여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쳤다. 표훈사는 원래 극락전을 중심으로 20여 동의 많은 전각이 있었지만 현재는 반야보전, 명부전, 영산전, 어실각, 칠성각, 능파루 등이 남아 있다. 사찰의 중심건물인 반야보전(般若寶殿)은 정면3칸(14.09m) 측면3칸(9.3m)의 다포계 팔작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97호 표훈사
강원도 금강군 내금강면 장연리에 있는 표훈사는 강원도 내금강 만폭동에 위치하고 있는 사찰로 금강산 4대 사찰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사찰이다. 《강원도지》에 의하면 670년(문무왕 10)에 신림사란 이름으로 창건되었다가 3년 후 표훈사로 이름을 고치고, 여러 차례 수리를 거친 후 오늘날의 모습에 이르렀다고 한다. 표훈사는 1459년(세조 5)에 보수, 1682년(숙종 8) 복원, 1778년(정조 1) 복원, 1864년(고종 원년) 보수기록을 통하여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쳤다. 표훈사는 원래 극락전을 중심으로 20여 동의 많은 전각이 있었지만 현재는 반야보전, 명부전, 영산전, 어실각, 칠성각, 능파루 등이 남아 있다. 사찰의 중심건물인 반야보전(般若寶殿)은 정면3칸(14.09m) 측면3칸(9.3m)의 다포계 팔작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97호 표훈사
강원도 금강군 내금강면 장연리에 있는 표훈사는 강원도 내금강 만폭동에 위치하고 있는 사찰로 금강산 4대 사찰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사찰이다. 《강원도지》에 의하면 670년(문무왕 10)에 신림사란 이름으로 창건되었다가 3년 후 표훈사로 이름을 고치고, 여러 차례 수리를 거친 후 오늘날의 모습에 이르렀다고 한다. 표훈사는 1459년(세조 5)에 보수, 1682년(숙종 8) 복원, 1778년(정조 1) 복원, 1864년(고종 원년) 보수기록을 통하여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쳤다. 표훈사는 원래 극락전을 중심으로 20여 동의 많은 전각이 있었지만 현재는 반야보전, 명부전, 영산전, 어실각, 칠성각, 능파루 등이 남아 있다. 사찰의 중심건물인 반야보전(般若寶殿)은 정면3칸(14.09m) 측면3칸(9.3m)의 다포계 팔작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97호 표훈사
강원도 금강군 내금강면 장연리에 있는 표훈사는 강원도 내금강 만폭동에 위치하고 있는 사찰로 금강산 4대 사찰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사찰이다. 《강원도지》에 의하면 670년(문무왕 10)에 신림사란 이름으로 창건되었다가 3년 후 표훈사로 이름을 고치고, 여러 차례 수리를 거친 후 오늘날의 모습에 이르렀다고 한다. 표훈사는 1459년(세조 5)에 보수, 1682년(숙종 8) 복원, 1778년(정조 1) 복원, 1864년(고종 원년) 보수기록을 통하여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쳤다. 표훈사는 원래 극락전을 중심으로 20여 동의 많은 전각이 있었지만 현재는 반야보전, 명부전, 영산전, 어실각, 칠성각, 능파루 등이 남아 있다. 사찰의 중심건물인 반야보전(般若寶殿)은 정면3칸(14.09m) 측면3칸(9.3m)의 다포계 팔작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97호 표훈사
강원도 금강군 내금강면 장연리에 있는 표훈사는 강원도 내금강 만폭동에 위치하고 있는 사찰로 금강산 4대 사찰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사찰이다. 《강원도지》에 의하면 670년(문무왕 10)에 신림사란 이름으로 창건되었다가 3년 후 표훈사로 이름을 고치고, 여러 차례 수리를 거친 후 오늘날의 모습에 이르렀다고 한다. 표훈사는 1459년(세조 5)에 보수, 1682년(숙종 8) 복원, 1778년(정조 1) 복원, 1864년(고종 원년) 보수기록을 통하여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쳤다. 표훈사는 원래 극락전을 중심으로 20여 동의 많은 전각이 있었지만 현재는 반야보전, 명부전, 영산전, 어실각, 칠성각, 능파루 등이 남아 있다. 사찰의 중심건물인 반야보전(般若寶殿)은 정면3칸(14.09m) 측면3칸(9.3m)의 다포계 팔작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97호 표훈사
강원도 금강군 내금강면 장연리에 있는 표훈사는 강원도 내금강 만폭동에 위치하고 있는 사찰로 금강산 4대 사찰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사찰이다. 《강원도지》에 의하면 670년(문무왕 10)에 신림사란 이름으로 창건되었다가 3년 후 표훈사로 이름을 고치고, 여러 차례 수리를 거친 후 오늘날의 모습에 이르렀다고 한다. 표훈사는 1459년(세조 5)에 보수, 1682년(숙종 8) 복원, 1778년(정조 1) 복원, 1864년(고종 원년) 보수기록을 통하여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쳤다. 표훈사는 원래 극락전을 중심으로 20여 동의 많은 전각이 있었지만 현재는 반야보전, 명부전, 영산전, 어실각, 칠성각, 능파루 등이 남아 있다. 사찰의 중심건물인 반야보전(般若寶殿)은 정면3칸(14.09m) 측면3칸(9.3m)의 다포계 팔작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97호 표훈사
강원도 금강군 내금강면 장연리에 있는 표훈사는 강원도 내금강 만폭동에 위치하고 있는 사찰로 금강산 4대 사찰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사찰이다. 《강원도지》에 의하면 670년(문무왕 10)에 신림사란 이름으로 창건되었다가 3년 후 표훈사로 이름을 고치고, 여러 차례 수리를 거친 후 오늘날의 모습에 이르렀다고 한다. 표훈사는 1459년(세조 5)에 보수, 1682년(숙종 8) 복원, 1778년(정조 1) 복원, 1864년(고종 원년) 보수기록을 통하여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쳤다. 표훈사는 원래 극락전을 중심으로 20여 동의 많은 전각이 있었지만 현재는 반야보전, 명부전, 영산전, 어실각, 칠성각, 능파루 등이 남아 있다. 사찰의 중심건물인 반야보전(般若寶殿)은 정면3칸(14.09m) 측면3칸(9.3m)의 다포계 팔작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98호 표훈사보덕암
강원도 금강군 내강리에 있다. 표훈사에서 남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만폭동 분설담의 오른쪽으로 20m이상 벼랑에 매달리듯 세워져 있는 절이다. 보덕암은 고구려 때 보덕화상이 창건한 것으로 전하는데, 지금의 건물은 1675년에 지은 것으로 이후 1808년에 중수하였다. 규모는 7.3m의 구리기둥과 석주로 마루귀틀을 받치고 그 위에 정면 1칸, 측면 1칸의 단칸 익공형식의 팔작지붕 기와집을 세웠다. 그리고 그 위로도 층층이 기둥과 보를 짜 올려 층층이 세운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98호 표훈사보덕암
강원도 금강군 내강리에 있다. 표훈사에서 남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만폭동 분설담의 오른쪽으로 20m이상 벼랑에 매달리듯 세워져 있는 절이다. 보덕암은 고구려 때 보덕화상이 창건한 것으로 전하는데, 지금의 건물은 1675년에 지은 것으로 이후 1808년에 중수하였다. 규모는 7.3m의 구리기둥과 석주로 마루귀틀을 받치고 그 위에 정면 1칸, 측면 1칸의 단칸 익공형식의 팔작지붕 기와집을 세웠다. 그리고 그 위로도 층층이 기둥과 보를 짜 올려 층층이 세운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98호 표훈사보덕암
강원도 금강군 내강리에 있다. 표훈사에서 남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만폭동 분설담의 오른쪽으로 20m이상 벼랑에 매달리듯 세워져 있는 절이다. 보덕암은 고구려 때 보덕화상이 창건한 것으로 전하는데, 지금의 건물은 1675년에 지은 것으로 이후 1808년에 중수하였다. 규모는 7.3m의 구리기둥과 석주로 마루귀틀을 받치고 그 위에 정면 1칸, 측면 1칸의 단칸 익공형식의 팔작지붕 기와집을 세웠다. 그리고 그 위로도 층층이 기둥과 보를 짜 올려 층층이 세운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98호 표훈사보덕암
강원도 금강군 내강리에 있다. 표훈사에서 남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만폭동 분설담의 오른쪽으로 20m이상 벼랑에 매달리듯 세워져 있는 절이다. 보덕암은 고구려 때 보덕화상이 창건한 것으로 전하는데, 지금의 건물은 1675년에 지은 것으로 이후 1808년에 중수하였다. 규모는 7.3m의 구리기둥과 석주로 마루귀틀을 받치고 그 위에 정면 1칸, 측면 1칸의 단칸 익공형식의 팔작지붕 기와집을 세웠다. 그리고 그 위로도 층층이 기둥과 보를 짜 올려 층층이 세운집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99호 정양사
강원도 금강군 내강리 내금강에 있는 표훈사 뒤 북쪽으로 험한 산길을 돌아 약 900m 가량 오르면 방광대라는 넓은 평지가 펼쳐진다. 이 방광대 산허리에 정양사가 자리 잡고 있다. 이 절은 신라 600년(진평왕 22)에 창건되었고, 661년(문무왕 원년)에 중수되었다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 태조가 여기에 와서 처음으로 절을 세웠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 사이 한 때 절이 황폐 되었다가 이때 다시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후 1326년(충숙왕 13)에 중수하였으며, 조선시기에 와서 여러 차례의 중건과 보수 공사가 있었다. 1458년(세조 4) 에는 해인사에 보관하였던 팔만대장경 판목 일부를 여기에 옮겨 보관한 일이 있었다 한다. 사찰의 배치는 방광대 중턱 평지에 남북 중심축을 따라서 북에서부터 반야전, 약사전, 삼층석탑과 석등이 있고 앞쪽 좌우에 부속 건물들이 있었으나 대부분은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 사찰의 중심건물인 반야전은 정면3칸(11.13m) 측면3칸(8.74m)의 다포계 팔작지붕이며, 조선 초기 형식의 오래된 건축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99호 정양사
강원도 금강군 내강리 내금강에 있는 표훈사 뒤 북쪽으로 험한 산길을 돌아 약 900m 가량 오르면 방광대라는 넓은 평지가 펼쳐진다. 이 방광대 산허리에 정양사가 자리 잡고 있다. 이 절은 신라 600년(진평왕 22)에 창건되었고, 661년(문무왕 원년)에 중수되었다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 태조가 여기에 와서 처음으로 절을 세웠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 사이 한 때 절이 황폐 되었다가 이때 다시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후 1326년(충숙왕 13)에 중수하였으며, 조선시기에 와서 여러 차례의 중건과 보수 공사가 있었다. 1458년(세조 4) 에는 해인사에 보관하였던 팔만대장경 판목 일부를 여기에 옮겨 보관한 일이 있었다 한다. 사찰의 배치는 방광대 중턱 평지에 남북 중심축을 따라서 북에서부터 반야전, 약사전, 삼층석탑과 석등이 있고 앞쪽 좌우에 부속 건물들이 있었으나 대부분은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 사찰의 중심건물인 반야전은 정면3칸(11.13m) 측면3칸(8.74m)의 다포계 팔작지붕이며, 조선 초기 형식의 오래된 건축이다.
[북한의 국보유적100]제100호 금장암사자탑
금장암사자탑은 강원도 금강군 내강리 금장골 금장암터에 있는 고려시대 초기의 이형 탑이다. 사자탑이라는 명칭은 기단부에 사자를 배치한 특수한 형식으로 특이한 형태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기단부에 네 마리의 사자를 앉히고 그 위에 탑신부를 형성하였으며 정상에 상륜부를 장식한 석탑으로 전체 높이가 3.87m 가량이다.